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납품 인증·유지비만 1억..,경영난에 '원전 노하우' 스스로 포기

[원전생태계 고사 위기]

'서플라이 체인' 균열...해외수주 경쟁력까지 약화

외국서 부품 조달땐 기존 설비 유지·보수도 차질

신한울 3·4호기 재개 등 정책 전환, 생태계 살려야

우여곡절 끝에 건설 재개가 이뤄진 울산시 울주군 새울원자력본부 신고리 5·6호기 건설 현장에서 신고리 5호기 격납철판(CLP)이 원자로 건물에 설치되고 있다. 오른쪽은 신고리 3·4호기의 모습. /연합뉴스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고집하면서 원전 생태계의 모세혈관에 해당하는 부품업체들이 ‘원자력품질보증자격인증(KEPIC·케픽)’을 잇따라 포기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렇게 가다가는 국내 원전 생태계가 완전히 죽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십년간 키워온 원전 생태계가 한번 무너지면 다시 복원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점에서 탈원전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2일 한 부품업체 사장은 본지에 “애써 따놓은 케픽 인증을 포기해야 하는 납품업체의 마음은 오죽하겠느냐”며 “수익 날 구멍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인증 유지비용까지 부담되다 보니 스스로 포기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토로했다. 케픽 인증을 위한 신규 심사비용은 2,000만원 수준이지만 심사를 통과하기 위한 데모제품 제작과 컨설팅 비용 등을 감안하면 3년마다 1억원의 유지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부품업체 사장은 “3년마다 (케픽 인증을) 갱신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인증 취득부터 유지까지 족히 1억원의 비용이 들어간다”며 “제대로 납품을 못하다 보니 케픽 인증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탈원전에 대한 정부의 집착이 크다 보니 납품업체들도 ‘언젠가는 풀리겠지’ 하는 기대마저 접고 있다. 애써 따놓은 케픽 인증을 스스로 포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원전 부품으로는 더 이상 생존이 어렵다고 판단한 부품업체들이 다시는 납품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케픽 인증을 내던지고 있는 것이다.





케픽 인증은 원전설비 품질을 확보하기 위해 설계부터 제작·설치·시공·운전·유지정비 등 기술과 제도적 요건을 갖춘 기업에만 주어진다. 원전산업의 진입장벽이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다. 다른 산업처럼 기존 업체가 사라지면 이종업체가 대체하는 식으로 산업이 현상유지되기 힘들다는 뜻이다. 케픽 인증은 국내 원전 10기, 아랍에미리트 수출 원전 4기에 적용됐다.

일부에서는 지난 2017년 10월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선언한 후 원전 부품산업의 위기감이 지속적으로 불거져왔다. 그때마다 남아 있는 업체를 통해 원전 유지나 보수는 문제없다는 게 정부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케픽과 같은 인증까지 스스로 포기하며 실력을 갖춘 업체들마저 이탈하는 등 수십년간 쌓아놓은 원전 생태계가 뿌리부터 고사되고 있다는 새로운 위기감이 나온다.



더구나 케픽 인증을 보유한 부품업체들이 하나둘 떠나면 사실상 원전 생태계의 모세혈관마저 고사되는 것이어서 완전 복원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정부가 한진해운을 파산시킬 때도 현대상선 하나로도 경쟁력 회복이 가능하다고 장담했지만 허언으로 끝나버렸다. 정부가 현대상선을 지원하고 있지만 과거의 국내 해운 경쟁력 회복은 요원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두산중공업 등 원청 기업들이 원전을 잇따라 포기하면서 모세혈관에 해당하는 납품업체들도 케픽을 스스로 버리는 상황까지 왔다”고 토로했다.

원전 생태계가 고사되면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해야 하기 때문에 납기는 물론 비용·안정성 문제까지 발생할 수 있다. 원전을 유지보수할 때 정부는 공공조달시장에서 경쟁입찰 방식을 선택하지만 부품이 안전과 직결되다 보니 오랜 납품 실적이 있는 기업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만일 원전부품의 국내 조달이 여의치 않아 해외 업체에서 납품을 받게 된다면 기존 설비의 유지보수 작업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익명을 요구한 원전 전문가는 “원전 보수는 통상 2개월이 걸리는데 보수계획은 1년 전부터 수립한다”며 “그래도 설비를 시작하다가 새로 고칠 부분이 발생하는데, 해외에서 부품을 들여오면 납기 문제로 보수가 그만큼 늦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학계에서는 부품을 들여올 수 있는 국가도 우리에게 원전기술을 전수한 미국·프랑스에 국한될 것이라고 관측한다. 해외에서 부품을 조달한다면 물류비만 감안하더라도 기존보다 원전을 보수유지하는 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 이유다.

천연가스·석유 등과 같이 해외 의존도가 높으면 언젠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만큼 글로벌 분업체계는 이어가야 하지만 부품 핵심기술을 보유한 업체들은 계속해서 물량을 주고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국산화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원전 부품업체만 천시하는 것은 국가 경쟁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성풍현 KAIST 원자력·양자공학과 교수는 “국내 원전부품 조달 생태계가 망가져 해외에서 공급을 받는다면 납기가 길어지는 것은 물론 비용·안전성 등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며 “원전 생태계는 한번 망가지면 복원이 어려운 만큼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재개하는 등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케픽 인증을 포기하는 기업들이 확산되면 해외 원전 수주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수원 측은 이에 대해 “지금 특별한 입장을 밝히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양종곤기자 ggm11@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