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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기획·연재
[오늘의 경제소사] 1974년 '마지막 일본군'의 투항

28년 밀림생활 한 오노다 소위





1974년 3월11일 필리핀 마닐라 말라카낭 궁전. 낡은 군복을 입은 52세의 작고 깡마른 남자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군도를 바쳤다. 군도를 받은 대통령은 바로 돌려줬다. ‘군인정신의 본보기’라는 극찬과 함께.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28년 8개월 만의 투항은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주인공은 옛 일본 육군 8사단 정보장교였던 오노다 히로 소위. 군령이 그의 청춘을 밀림에 붙잡았다. 패배를 앞둔 일본군의 전형이던 ‘전원 옥쇄(玉碎)’와 다른 명령을 받았다.

패퇴 직전 8사단장은 부하들에게 ‘생존해 게릴라전을 펼쳐라.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구출하러 온다. 옥쇄는 불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오노다의 일행은 40여명. 일본의 항복 사실도 모른 채 싸우다 대부분 투항하거나 사살됐으나 오노다와 3명의 병사는 더 깊은 밀림으로 들어갔다. 동굴을 파고 끼니를 위해 동물을 잡거나 마을을 털었다. 1950년 1명이 투항하고 1954년과 1972년 2명이 사살돼 혼자 남았어도 그는 전의를 꺾지 않았다. 특히 1972년 교전으로 그의 생존이 알려지며 현지에 도착한 형이 방송으로 투항을 권유했으나 ‘미군의 간계’로 여기고 더 숨었다.



세상에 나온 계기는 대학을 중퇴하고 탐험에 나선 스즈키 유키오(25세)의 권유. 루방섬을 뒤진 끝에 찾아온 스즈키에게 오노다는 ‘직속상관이 명령한다면 투항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서점을 운영하던 직속상관의 방송을 듣고서야 그는 산에서 내려왔다. 투항 당시 총검은 언제든 교전이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필리핀은 군경 30명을 죽이고 100여명에게 부상을 입힌 그를 방면하며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았다. 마침 석유파동의 직격탄을 맞아 경제가 휘청거리던 시절. 30여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그를 일본인들은 대대적으로 반겼다.

그는 정말 ‘마지막 황군이었을까’. 반만 맞다. 대만 의용대 출신이어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같은 해 11월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나카무라 테루오(이광휘)가 ‘최후의 일본병’이다. 일부 비판론도 없지 않다. 훔친 라디오로 도쿄올림픽(1964년)을 알았고 경마 방송을 들으며 내기도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귀국 후 행보만큼은 확실하다. 정부가 주는 위로금 100만엔을 거절하고 시민들이 모아준 의연금을 야마구치신사에 바쳤다. 2014년 92세로 죽을 때까지 그는 위안부 존재를 부정하고 일본 정신의 부활을 외쳤다.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이런 우익이 있었는지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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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0 08:00:00시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