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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광주대단지 6시간의 저항

철거민 신도시의 고립과 차별

흥분한 철거민 등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정부 차량을 불태우고 있다.




1971년 8월10일 오전11시40분, 서울시 성남출장소 부근 공터. 궐기대회에 모인 5만 군중이 분노로 술렁거렸다. 11시에 대책을 직접 발표한다던 서울시장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흥분한 군중은 서울시 대단지 사업소로 몰려갔다. 일부는 서울시 소속 지프를 개울 바닥에 처박았다. 군중은 사업소의 집기를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요즘 행정구역상 경기도 성남에서 발생한 이날 소요는 박정희 정권에서 일어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중 봉기였다. 한국 정치와 신도시 개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슬 퍼렇던 3공 시절,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광주대단지 난동’이라고 불렀으나 정말 그랬을까. 난동보다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기본권 투쟁의 성격이 강하다. 사건의 근본 원인은 빈곤과 주택 문제. 수출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저임금·저곡가 정책은 대규모 이농과 도시 빈민, 무허가주택과 철거민 문제를 낳았다. 서울시가 도시 미관과 위생을 위해 판자촌을 부수면 새 판자촌이 들어섰다. 고민하던 정부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 350만평을 평당 250원에 사들여 대규모 단지를 조성하고 1969년부터 청계천과 용산, 영등포 일대의 판자촌 주민 2만1,372가구를 강제 이주시켰다.



문제는 생활 여건이 형편없고 토지 불하 가격도 비쌌다는 점. 당초 약속과 달리 도로와 상하수도는커녕 일자리도 없었다. 정치는 허허벌판에 내버려진 철거민들에게 환상을 안겨줬다. 7대 대선(4월)과 8대 총선(5월)에서 여당 후보들은 대규모 공단 유치와 토지 무상불하, 세금 면제 같은 감언이설을 쏟아냈다. 날마다 도로와 상수도, 공업단지 기공식도 열려 투기꾼들이 찾아와 땅을 사들였다. 막상 선거가 끝나자 정부의 태도가 바뀌었다. 불하 가격을 평당 2,000원에서 최고 1만6,000원(일시납)까지 매겼다. 경찰도 공무원도 줄행랑 친 이날의 시위는 누적된 불만의 분출이었다.

사태는 여섯 시간 뒤 서울시가 불하 가격 인하와 분할 상환, 세금 면제 등 요구조건을 수용하며 가라앉았다. 이 사건은 선 인프라 구축, 후 신도시 입주라는 원칙을 낳았다. 고 제정구·김근태, 손학규, 김문수 등 서울대 운동권과 김진홍 목사 등도 이 사건을 전후해 도시 빈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못 가진 철거민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국민들을 차별하고 고립시켰던 광주대단지 사건의 시제는 과거완료형일까. 차별은 어느 틈에 개개인의 의식 속에 스며들었다. 담 하나 건너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학급 배정까지 차별하는 행태는 49년 전보다 고약하고 악랄하다.
/권홍우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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