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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칼럼] 영점부터 바로 잡아야 할 한국전쟁사

국방부 발간 공간사 국내외에서 외면

공적 부풀리기 의혹에 교훈도 없어

독일은 패전일수록 중요하게 연구

같은 실수 피하고 교리 발전에 활용

전작권 전환 위해서도 필수적 과제





가을이다. 추수뿐 아니라 내년 이후를 위해 여름을 반추하는 현명한 농부처럼 우리 군에도 판단의 시간이 왔다. 지난여름 우리는 고 백선엽 장군의 현충원 안장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사회적 분열상도 그대로 드러났다. 문제는 비용만 치르고 합의나 교훈은 찾지 못한 채 유야무야 잊고 넘어간다는 점이다. 냄비처럼 쉽게 달궈졌다가 식어버리는 세태는 이방원의 ‘하여가’식 사고에 맞닿는다. ‘이런들…저런들 어떠하리’라는 인식 때문에 우리는 수많은 대가를 치렀다. 경제적으로 외환위기(IMF)를 겪었고 정치에서는 패거리 문화가 굳어졌다. 방산 비리도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힌 조직문화와 인맥에서 싹텄다.

사회에 만연한 ‘좋은 게 좋은 거’ 문화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대척점인 ‘원칙’에 있다. 여름을 달궜던 백선엽 논쟁을 이 가을에 다시 불붙일 의도는 전혀 없다. 그래도 소득을 얻지 못하고 사회적 비용만 날린 채 지나가기에는 해마다 반복해 수해를 입는 농부와 다를 바 없다. 백선엽 논란을 보다 생산적으로 끌어올릴 만한 제언이 있다. 한국전쟁사를 다시 해부해보자는 것이다. 국방부가 간행한 ‘한국전쟁사’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다. 미국·일본은 물론 러시아와 중국이 펴낸 한국전쟁사보다 국내외 학자들에게 외면받는다.

우리가 쓴 한국전쟁사는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수없이 색칠됐다는 점이다. 유력 장군이 공적을 과대 포장하면 다음 개정판에서는 다른 장군들의 입김이 작용해 어디부터 손봐야 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전사를 보훈의 근거문서쯤으로 인식한 탓이 크다. 죽어서 말이 없는 전사자 대신 훈장의 상당 부분을 받았다는 행정요원들의 펜에 의해 기술된 공훈도 많다.

고 백선엽 장군이 이런 의문의 중심에 있다. 최근에는 백 장군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 30년간 군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장을 사실상 ‘종신직’으로 맡으며 전쟁사를 ‘셀프 영웅화’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독일이나 미국은 패전일수록 더욱 철저하게 분석한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는 지우거나 잊어버리려 노력한다. 승리로 둔갑되는 경우도 있다. ‘육탄10용사’로 포장된 한 부사관이 북한에서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발간을 맡은 군사편찬연구소는 공산권까지 포함해 외국의 공간사까지 비교 검토해 전쟁사를 발간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쓴 한국전이 업무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장교를 어느 병과, 어떤 계급에서도 만난 적이 없다. 한국전쟁 공간사가 안고 있는 두 번째 문제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사건 나열 중심이어서 교훈을 찾기 어렵다.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작전적 의도에 대한 분석도 없다.

전쟁사를 제대로 활용하는 나라는 단연 독일이 손꼽힌다. 처음으로 참모본부를 운영하고 근대 전략전술을 개발한 독일은 참모본부를 구성하며 인사·정보·작전·군수 등 4개 참모에 2개 직할대(정보대와 전사발간팀)를 뒀다. 전사는 작전참모부에서 맡았다. 이전의 승패 원인을 분석해 앞날의 전투에 활용하자는 취지에서다. 독일은 1차대전 전에 슐리펜 계획을 짜면서 기원전 216년 로마를 격멸한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까지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한국전쟁사 재발간의 최대 목적은 과거를 거울삼아 상승의 군대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원칙을 세우고 백 장군 논란의 종지부를 찍자는 목표는 부수적일 뿐이다. 전시작전권 전환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과거 전쟁을 분석할 의지와 능력이 없는 군대가 앞으로의 전쟁 계획을 제대로 짤 수 있을까. 독자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할 수 없으면 전작권 전환도 공염불이다.

전사를 새로 쓴다면 기술의 원칙이 분명할 필요가 있다. E H 카의 말대로 전쟁사야말로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돼야 한다. 과거와 대화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인재들이 주축이 돼 한국군이 걸어온 전투 현장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의 운동에 관해서’를 통해 “최초의 측정이 조금만 빗나가도 뒤에는 수천배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철학자들은 가끔 이 문장에서 측정을 진실로 바꿔 인용한다. 한국전쟁사는 너무도 빗나갔다. 영점부터 다시 잡아 새로 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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