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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탐나는 예술, 탐라가 품다

■미술관이 숨쉬는 섬 제주도

100대 골프 코스 핀크스 인근에 '포도뮤지엄'

새하얀 외관속 1층 층고 5.4m 시원하게 뚫려

하늘과 한라산 한눈에 펼쳐지는 '기당미술관'

서귀포 바다 옆 조선 백자 닮은 '왈종미술관'

자연이 빚어낸 제주 풍경에 인간의 예술 담아


제주에 가면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하늘과 바다, 바람 따라 넘실거리는 오름의 풀과 꽃이 탄성을 쉴 새 없이 부른다. 하지만 인간은 단지 바라보고 반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자연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한다. 더 나아가 자연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한다. 다른 생명체는 가지지 못한 것을 인간은 가졌기 때문이다. 바로 예술성이다.

제주의 천혜 자연이 인간의 예술성을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일까. 제주는 곳곳에 미술관을 품고 있다. 바닷가에서도, 산기슭에서도, 숲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미술관을 발견할 수 있다. 제주 여행 코스를 계획할 때 바다와 오름, 도시를 잇는 경로에 미술관을 넣어보자. 제주의 새로운 모습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지난 4월 문을 연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의 포도뮤지엄. 개관전은 공익법인 티앤씨재단이 기획했다.




■산속 미술관, 제주의 평화를 말하다


제주에는 국내 최초로 세계 100대 골프 코스에 선정된 곳이 있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SK 핀크스 골프장이다. 미국 사할리CC, 하와이 코올리나GC 등 전 세계 170여 개 명문 골프 코스를 설계한 고(故) 시어도어 로빈슨이 설계한 마지막 작품으로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곡선미가 돋보인다. 핀크스 골프 리조트 내 클럽하우스와 포도호텔도 유명하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자연주의 철학이 녹아 있는 건축물로 포도송이를 닮은 호텔 외관과 주변 풍경은 그 자체로 충분한 볼거리다.

핀크스 골프 리조트 인근에 들러야 할 곳이 최근 한 군데 더 늘었다. 지난 4월에 오픈한 ‘포도뮤지엄’이다. 새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기존의 다빈치박물관을 미술 작품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곳으로 주변 도로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고 외관도 단조로운 편이다. 하지만 하얀 박스형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미술관은 지하 1층~지상 2층, 연면적 2,653㎡(약 804평) 규모로 순수 전시 공간은 440평 정도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5.4m에 달하는 1층 층고다. 웬만큼 규모가 큰 설치 작품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시원하게 뚫린 공간이다.

포도뮤지엄에서 전시 중인 권용주 작가의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개관전은 공익재단 티앤씨(T&C)재단이 공들여 기획했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제주전(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내년 3월까지 열린다. 참여 작가는 강애란, 권용주, 성립, 이용백, 최수진, 진기종, 구와쿠보 료타, 장샤오강 등 한중일 작가 8인이다. 이들은 한 공간에 모여 세상 모든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다. 이들 작가의 작품 외에도 재단 측이 직접 기획한 5개의 테마 공간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소리를 듣고, 활자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영상 한가운데 서봄으로써 관람객 각자는 언제든지 혐오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포도뮤지엄 2층에 전시돼 있는 케테 콜비츠 작품들.


2층에서는 ‘케테 콜비츠-아가, 봄이 왔다’전이 진행 중이다.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조각가인 케테 콜비츠(1867~1945년)는 노동과 빈곤, 전쟁과 죽음, 모성 등을 주제로 평생 작품 활동을 했다. 1·2차 세계대전에 아들과 손자를 모두 잃은 그의 비통한 심정이 전시 작품들을 통해 오롯이 전해진다. 두 전시 모두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오늘날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불리게 된 역사적 배경과 작품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서로 연결돼 있음을 생각한다면 포도뮤지엄은 제주 여행에 남다른 의미를 더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본태박물관 야외에 설치돼 있는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유포리아’.


포도뮤지엄에서 차로 4분 정도를 달리면 본태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핀크스 골프 리조트와 마찬가지로 주변 경관을 고스란히 살렸고 빛과 물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건물 자체가 예술인 이곳에서는 백남준, 이브 클랭, 페르낭 레제, 살바도르 달리, 구사마 야요이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 외에 다양한 한국 전통 공예품도 감상할 수 있다.

이타미 준이 설계한 제주 방주교회.


본태박물관을 방문한다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방주교회까지 발길을 뻗어볼 만하다. 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는 제주의 자연과 인간이 함께 빚어낸 작품으로 마음의 위안과 기념사진을 얻고 싶다면 이동 경로에 포함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변시지가 생전 사용했던 물건들이 기당박물관 내부에 전시돼 있다.


■제주 화가, 산과 바다·바람을 그리다


푸른 하늘, 넉넉한 산, 그리고 드넓은 바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미술관을 원한다면 서귀포 시내로 향해보자. 첫 번째 코스는 삼매봉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기당미술관이다. 한라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 자리에 1987년 문을 연 이곳은 제주 출신 재일 교포 사업가 기당 강구범이 건립해 서귀포에 기증한 미술관이다. 김기창·장우성·서세옥·박서보·강요배 등 국내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단연 주목해야 할 작가는 ‘폭풍의 화가’ 변시지다. 강구범과 변시지는 외사촌 지간으로 이 미술관은 사실상 강구범이 변시지를 위해 지었다고 할 수 있다.

미술관 상설 전시실에는 변시지의 ‘황토빛 제주’가 가득하다. 변시지는 제주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미술을 공부한 화가다. 그림 실력이 워낙 뛰어나 불과 스물셋에 일본 서양화단 최고 권위인 ‘광풍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현지의 조선인 차별 분위기를 실력으로 누른 것이다. 그의 최연소 수상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 잘나갔지만 민족의식이 그를 고국으로 향하게 했고 오십이 되어서는 고향에 정착했다. 그는 제주의 폭풍우 치는 바다를 꿈틀대는 황토빛으로 그려냈다. 그림 속에는 상실의 아픔을 숱하게 겪었던 제주 사람들도 그려 넣었다. 왜 제주가 황토빛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변시지는 생전 이런 말을 남겼다. “아열대 태양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빛으로 승화됩니다. 나이 오십에 고향 제주의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 사람들의 삶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토빛으로 물들어감을 체험했습니다.”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전경.


서귀포에는 이중섭미술관도 있다. 이중섭의 고향은 아니지만 그가 서귀포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지역의 풍광과 사람들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에 서귀포시는 1995년 그가 머물렀던 곳 주변을 이중섭거리로 지정하고 미술관도 세웠다. 미술관 1층 상설 전시실에는 이중섭의 작품과 관련 서적,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작품 수가 많은 편이 아니라 아쉽지만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그의 삶이 전시실 내에 투영돼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왈종미술관 옥상정원에서 내려다본 서귀포 앞바다.




서귀포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미술관은 단연 이왈종의 작품을 전시하는 왈종미술관이다. 조선백자를 닮은 왈종미술관은 정방폭포 주차장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옥상정원에 올라가면 푸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섶섬과 문섬·새섬을 모두 품은 넉넉한 바다는 가히 장관이다. 뒤로 돌아서면 곧바로 한라산을 마주하게 된다.

자연에 푹 빠져 작품 감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왈종미술관은 1층에 수장고와 도예실이 있고 2층에 회화·도예·판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왈종이 제주에 정착해 20여 년 동안 사는 내내 집중했던 주제인 ‘제주 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와 관련된 작품이 다수를 이룬다. 이왈종의 작품 속에서 인간의 희노애락은 꽃과 새, 나무와 풀이 되기도 하고 자동차와 골프가 되기도 한다.

제주현대미술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곶자왈 시비.


■원시림 곶자왈, 예술을 품다


많은 이가 제주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제주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연 공간이 많다는 점이다.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덤불을 의미하는 ‘자왈’의 합성어인 곶자왈은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만들어낸 암괴 지대에 형성된 원시림으로 제주에만 존재한다. 농사를 짓기에는 부적합해 사람들은 오랫동안 곶자왈을 외면했지만 오늘날에는 제주의 자연 생태계를 대표하게 됐다. 곶자왈은 제주 도내 4개 지역에 분포하는데 그중 한 곳이 제주 서남쪽에 위치한 한경·안덕 지대다. 한경·안덕 곶자왈은 풍광이 몹시 빼어나다.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새소리에 홀린 전국의 화가·공예가·서예가·조각가·사진가 등이 찾아와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을 만들었다. 마을 입구에는 박서보·김흥수·박석원·조수호 등의 작업 공간 위치를 알리는 화살표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오래도록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깊은 숲과 덤불이 인간의 예술을 받아준 것이다.

돌과 풀·꽃이 어우러져 있는 김창열미술관 입구.


마을 안에서도 가장 큰 전시 공간은 2016년 문을 연 김창열미술관이다. 미술관 이름에서 단번에 알 수 있듯이 올해 초 타계한 ‘물방울의 화가’ 김창열을 위한 공간이다. 미술관은 생전 그가 제주도에 기증한 대표 작품 220점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홍콩에서 열린 경매에서 김창열의 1978년 작 ‘CSH 1(182×227.5㎝)’이 14억 원에 낙찰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 계산으로도 대단한 규모의 기증이다. 김창열은 제주 출신 화가가 아니다. 평안남도 맹천이 고향이다. 그럼에도 그가 제주에 귀한 작품을 기증한 것은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서 1년 6개월 정도 피란 생활을 하면서 제주와 인연을 맺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김창열미술관은 건립 예산이 100억 원에 육박하는 큰 건물이지만 곶자왈의 자연스러운 풍광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곶자왈에 폭 안겨 있다는 표현이 적합할 듯싶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임을 알려주는 표지판 앞에 서는 순간 오름을 타고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이 먼저 방문객들에게 다가와 환영 인사를 건넨다. 오솔길을 따라 숲속으로 잠시 걸어 들어가면 이내 미술관 입구가 나타난다.

김창열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물방울 작품들.


미술관은 홀로 우뚝 솟기보다는 주변 지대와 키 높이를 맞추는 쪽을 택했다. 건물 외벽을 어두운 색으로 나뭇결 무늬가 드러나도록 콘크리트 처리한 덕분에 현무암과 목조로 지은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공간 구조도 독특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크기와 높이가 다른 8개의 정육면체가 중정(中庭)을 둘러싼 모양새다. 김창열의 예술 세계를 상징하는 한자 ‘돌아올 회(回)’ 자를 떠올리게 한다. 건축가 홍재승이 김창열의 회귀 철학을 미술관 설계에 고스란히 녹여낸 덕분이다.

중정에 설치돼 있는 작품 ‘삼신’.


시원하게 높은 전시실의 층고도 눈에 띈다.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큰 김창열의 작품을 걸기에 넉넉한 공간이다. 천장에서는 자연광이 은은하게 스며든다. 물방울 분수는 때때로 영롱한 무지개를 머금는다. 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람객에게 소박한 행운이 따라야 한다. 미술관 바깥에는 올해 초 심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나무 아래 작디작은 표지석에 나무 주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창열. 그는 배롱나무 아래 영면했다.

제주현대미술관 입구.


마을 안에는 제주현대미술관도 있다. 김창열미술관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다. 제주현대미술관 역시 곶자왈의 무성한 나무와 풀·꽃에 둘러싸여 있다. 큰길에서 미술관으로 향하는 작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숲속 비밀의 공간으로 향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제주현대미술관은 국내 공립미술관 중에서 김흥수 화백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김흥수는 옛 북제주군에 작품 20점을 기증했고 이는 제주현대미술관 건립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에 제주현대미술관은 2007년 개관 이래 김흥수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제주현대미술관은 마을 안에 분관도 별도로 두고 있는데 이곳에는 한국 구상미술 대표 작가인 장리석과 박광진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제주현대미술관에 상설 전시 중인 김흥수의 작품들.


예술을 한가득 품은 곶자왈은 최근 제주도와 제주관광공사가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추천하는 ‘제주 슬로우 로드 내비게이션’ 코스에도 포함돼 있다. 빠른 길 대신 느린 길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면서 제주의 자연과 숨은 명소를 제대로 즐겨보라는 의미에서 기획된 여행 코스로 비짓제주 모바일 홈페이지 등에 소개돼 있다. 김창열미술관과 제주현대미술관의 경우 모슬포에서 출발해 알뜨르비행장-송악산-사계항-제주항공우주호텔-오설록티뮤지엄-동광육거리-금오름을 지나 마지막에 도착하면 좋은 곳으로 설정돼 있다. /제주(글·사진)=정영현기자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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