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사회·지배구조(ESG)가 기업 경영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국내 회계법인들도 관련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구체적인 경영 전략 컨설팅과 재무 자문 등 다양한 분야로 회계법인의 ESG 업무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더구나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이 비재무정보 표준 공시 기준을 마련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오는 2025년부터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에 ESG 공시를 의무화할 예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회계법인이 각 기업의 ESG 보고서에 대해 ‘회계감사’에 준하는 업무를 맡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28일 회계업계에 따르면 삼일PwC·삼정KPMG·EY한영·딜로이트안진 등 ‘빅4’ 회계법인들은 ESG 컨설팅 조직을 구축하며 사업 확장에 나서고 있다. 안세회계법인 등 중견급 회계법인도 글로벌 외국계 컨설팅업체와 제휴를 맺으며 ESG 자문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회계법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한국공인회계사회에서도 지난 3월 ESG위원회를 발족하며 후방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인증 수준 개발 등 회계업계 내 ESG 현안을 발굴하고 정부·정치권의 관련 정책 추진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얼핏 봤을 때 ESG는 재무제표 감사나 재무 컨설팅을 주 업무로 하는 회계법인과 크게 상관없는 분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회계법인이 잇달아 관련 시장에 진출하고 있는 것은 ESG 수준이 높은 기업에 전 세계 투자 자금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펀드 평가사 모닝스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말 기준 전 세계 ESG펀드 규모는 1조 9,845억 달러(약 2,237조 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3월 말보다 137%나 증가한 수치다.
ESG가 자금 조달, 나아가 기업 재무 전략에서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가치 평가나 재무 전략 컨설팅에 특화된 회계법인과 접점이 있는 대목이다. 백인규 딜로이트안진 ESG센터장은 “기존에는 ESG 대응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다른 기업들도 대응 필요 여부와 영역 등을 판별하기 위한 기초 진단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고 있다”며 “예를 들어 에너지 소비가 많은 기업군의 경우 기존보다 체계적인 대응을 위해 고도화된 전사 전략 수립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계법인의 ESG 컨설팅 영역은 크게 전략·실행, 재무 자문, 공시·인증으로 나뉜다. 우선 전략·실행 파트에서는 각 기업의 거시적인 ESG 전략을 짜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행 과제를 수립한다. 각 회계법인 컨설팅 본부 출신들이 주로 전략·실행 컨설팅 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최근 ESG 전략을 수립하는 기업이 늘면서 회계법인 입장에서 가장 뜨거운 분야로 떠올랐다.
김진귀 삼정KPMG 전무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조정할지, 지배구조 관점에서 어떤 조직을 만들지, 구체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 목표치를 얼마나 설정할지 등을 전략 단위에서 논하게 된다”며 “이후에는 각 분야별 이행 과제 컨설팅으로 넘어간다”고 설명했다. ESG 관련 인수합병(M&A)이나 듀 딜리전스(실사) 업무를 맡는 재무 자문 부문의 중요성 역시 커지고 있다.
회계업계에서 새로운 먹거리로 두고 있는 분야는 ESG 공시·인증이다. 주로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나 ESG 채권·여신이 기업의 ESG 수준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검증·인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전통적인 회계법인 업무로 따지면 감사 의견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회계법인 본연의 사업 부문과 가장 맞닿아 있는 분야인 셈이다. 실제로도 공시·인증 부문에서는 감사 본부 출신 회계사들이 주로 활동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그린워싱(친환경 기업인 척 속이는 것)’이 회계 분식과 비슷한 수준의 편법 행위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ESG 공시·인증 업무의 중요도가 커질 것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IFRS재단이 11월 설립할 국제지속가능성표준위원회(ISSB)를 통해 새로운 비재무정보 공시 기준을 마련할 계획이라 향후 공시·인증 부문이 회계감사와 비슷한 지위를 누릴 것으로 전망된다. IFRS가 전 세계 150여 개국에서 쓰이고 있는 회계기준을 내놓고 있는 기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ISSB 설립은 향후 우리나라 기업 비재무정보 공시에 끼치는 영향은 클 것으로 예상된다. IFRS재단은 “사업보고서에 공시된 지속 가능성 관련 정보에 대해 외부감사를 받는 방안을 향후 검토할 예정”이라고도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2025년부터 자산 2조 원 이상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에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공시가 의무화하는 것도 국내 회계법인의 ESG 공시·인증 부문 성장에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박재흠 EY한영 CCaSS 리더는 “ESG 정보가 사업·감사 보고서 등에 기재되면 이를 회계법인 등 제3자가 인증하는 업무가 확대될 것”이라며 “그린워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회계법인처럼 오랜 기간 감사·검증 경험을 갖춘 업체에서 합의된 방법론을 기반으로 ESG 공시 정보를 검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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