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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해머·최루탄 사라졌지만…신종 변칙 날치기로 퇴행하는 국회

◆국회선진화법 10년 …국회는 선진화했나

국회의장 직권상정 제한, ‘동물국회’오명벗기 성과 불구

안건조정위등 입법독주 견제장치가 되레 다수당 무기화

‘검수완박’ 강행 속 ‘꼼수 탈당’…나쁜 선례 고착화 우려

의회 제도보다 운영이 중요…비상식에 유권자 심판을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4월3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검수완박’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연설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회기 쪼개기’ 편법으로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했다. /서울경제DB




2011년 11월 박희태 국회의장의 대리였던 정의화 부의장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본회의에 직권 상정하자 이에 맞서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이 최루탄을 본회의장에 터뜨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보다 3년 전인 2008년 12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는 여당이 회의실 문을 잠그고 비준안을 상정하자 야당 당직자들이 해머와 쇠지렛대(빠루)로 문을 때려 부수고 전기톱까지 동원했다. 외신들은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난투극 사진을 싣고 대한민국 국회를 조롱했다. 당시 18대 국회는 ‘동물 국회’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여야 정치권은 막장 국회상에 대한 반성에서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리는 국회법 개정안을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2012년 5월 2일 통과시켰다.

2008년 12월 18일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 단독 상정하자 민주당 당직자들이 해머와 쇠지렛대로 회의장 문을 부수고 있다. 연합뉴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 국회는 과연 선진화했을까. 현재 21대 국회에서는 적어도 해머와 전기톱은 사라졌다. 하지만 육탄전의 빈자리는 온갖 변칙과 탈법이 채우고 있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정국의 절정이었던 올 4월 26일 밤~27일 새벽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는 의회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줬다. 안건조정위는 다수당이 쟁점 법안을 의석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이다. 제1교섭단체와 그 외 소속 의원을 각각 3명씩 동수로 위원회를 구성해 최장 90일 동안 논의하고 재적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가결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민형배 의원을 ‘기획 탈당’시켜 무소속으로 만드는 희대의 꼼수로 입법 속도전에 제동을 거는 안건조정위의 기능을 무력화했다. 친여 무소속 꽂아 넣기로 3 대 3이어야 할 균형의 원리는 4 대 2로 무너졌다. 결론이 뻔하니 최장 90일간의 토론을 통한 숙려는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다음은 제395회 임시국회 법사위원회 안건조정위 속기록.

-권성동 의원(국민의힘)=(탈당한) 민형배 의원은 민주당이지 않습니까. (여야) 동수가 아니잖아요.

-진성준 의원(민주당)=여야 동수잖아요.

-유상범 의원(국민의힘)=민 의원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위원이 아닙니다.

-김진표 안건조정위원장(민주당)=민 의원이 안건조정위원이 될 수 없다는 논거가 없잖아요. 법사위원장이 지정하면 그대로 되는 것이지요. 검찰청법 개정안 등 11건을 일괄 상정합니다.

-전주혜 의원(국민의힘)=위원장님, 뭐 하시는 거예요.(장내 소란)

-김 위원장=법사위원장에게 따지세요. 저는 안건만 조정할 뿐이에요. 더 이상 토론이 안 되는 분위기여서…. 토론을 종결하고 표결 처리하겠습니다.

김진표 위원장이 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안 가결을 선포한 시각은 밤 11시 54분. 70여 년 동안 이어져온 형사 사법 체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중대 사안임에도 ‘검수완박’ 입법의 첫 단추는 단 17분 만에 채워졌다. 꼼수는 이어졌다. 야당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수단으로 의사 진행을 지연시키는 무제한 토론)를 저지하기 위해 임시국회 회기를 중단하고 하루짜리 본회의를 연거푸 열었다. 이른바 ‘회기 쪼개기’다. 그렇게 해서 4월 30일 검찰청법, 5월 3일 형사소송법이 각각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민주당은 “법대로 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강변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절차의 정당성과 과정의 공정성이 결여된 입법 폭주였다. 위헌·위법 논란도 거세다.

2016년 1월 21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요구한 국회선진화법 개정안의 직권 상정을 거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선진화법은 다수당의 폭주를 용인하려고 만든 게 아니다. 오히려 이 법이 처음 적용된 19대 국회는 ‘식물 국회’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19대 국회 당시 안건조정위가 열린 적도 없었다. 국회선진화법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소수당 의견 존중과 권익 보호다.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 요건 강화가 대표적 사례다. 천재지변 등 비상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여야 합의 없이는 직권 상정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안건조정위와 필리버스터도 그런 장치다. 또 다른 축은 입법 정상화다. 소수당의 발목 잡기로 법안 처리가 무한정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건신속처리제(패스트트랙)와 예산안 부수 법안의 본회의 자동 부의 제도 등이 마련됐다.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부터 눈에 띄게 감소했다.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직권 상정 건수는 16대 국회 6회, 17대 국회 29회, 18대 국회 99회로 급격히 증가하다가 국회선진화법이 시행된 19대 국회에 9회로 급감했고 20대·21대 국회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한국입법학회장을 지낸 홍완식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선진화법은 흔히 ‘몸싸움 방지법’으로 불리는데 그 목표는 달성했다고 본다”며 “하지만 의사 진행과 입법 과정의 선진화는 갈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검수완박 법제화 과정은 국회선진화법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냈다는 의견도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국회선진화법은 잘 활용하면 모를까 잘 쓰지 못하면 부작용이 너무 크다”며 “소수당의 다수당 견제 장치가 실제로는 다수당의 엄청난 무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국회선진화법이 아니라 국회후진화법”이라고 혹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안건조정위를 무력화하면 본회의 상정까지 최장 330일이 소요되는 패스트트랙 방식보다 훨씬 초고속으로 법안을 처리할 수 있다.

21대 국회 들어 180석가량의 압도적 과반 의석을 가진 거대 여당은 거리낌이 없었다. 안건조정위 무력화가 이번만도 아니다. 한때 국회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한 민주당은 위성 정당인 열린민주당 의원 또는 민주당에서 출당·탈당한 무소속 의원을 안건조정위에 투입하면서 의결 구조를 왜곡했다. 2020년 12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 때 최강욱 당시 열린민주당 의원을, 지난해 언론중재법 개정 때는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을, 탄소중립법 제정 때는 윤미향 무소속(민주당 출당) 의원을 배치해 법안을 관철시켰다. 이렇게 통과된 법안이 10건이 넘는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안건조정위의 무력화는 신종 변칙 날치기”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2020년 12월 10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미소를 짓고 있다. 앞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안건조정위에 여당의 위성 정당인 열린민주당의 최강욱 의원을 투입해 법안을 변칙 처리했다. 연합뉴스


숙의 없는 졸속 입법의 부작용도 심각한 문제다. 검수완박 제도만 해도 곳곳에 허점이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경찰 수사에 대한 고발인의 이의신청권을 삭제한 것은 대표적인 독소 조항으로 지목된다. 21대 국회에서 안건조정위를 거친 20여 개 법안 대부분이 불과 몇 분 만에 가결됐다. 손병권 중앙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는 “나쁜 선례는 관행으로 고착화할 수 있다”며 “초유의 위장 탈당은 맞보복을 부를 가능성이 있어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국민의힘은 검수완박 정국이 끝나자 기획·위장 탈당을 금지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 2건을 발의했다. 제1교섭단체의 탈당 또는 출당 의원의 안건조정위 보임을 금지하는 법안과 조정위를 제1·제2교섭단체의 동수로 구성하는 법안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회의적으로 본다. 여야의 타협안을 도출하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개정한다고 해도 또 다른 우회 통로를 찾아 국회법이 누더기가 될 것이라서는 이유에서다. 제도보다 운영의 문제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제도를 바꿨다고 해서 저절로 선진화가 되겠느냐”며 “상식 이하의 행태를 보일 경우 유권자가 표로 응징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위장 탈당 문제를 국회법의 허점이라고 본다면 외려 위법행위까지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집권을 계기로 미국의 민주주의에 경고등이 켜졌다고 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공동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돌아가고 오랫동안 이어지기 위해서는 성문화하지 않은 규범이 헌법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규범은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이해,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라고 했다. 21대 국회 하반기 원 구성 협상에 나선 여야 정치권이 모두 곱씹어볼 대목이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국회 회기 쪼개기 받아준 국회의장 책임 크다”


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지연시키는 ‘필리버스터’는 유신 체제 등장으로 1973년부터 없어졌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으로 부활했다. 이에 따라 19대 국회 이후 필리버스터는 모두 일곱 차례 이뤄졌다. 19대 국회에서는 2016년 테러방지법이 유일했고 20대 국회에서는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제정안이 필리버스터 대상이었다. 21대 국회에서는 공수처법·국정원법·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2개 법안에 적용됐다.

필리버스터는 △토론에 나서는 의원이 더 이상 없거나 △재적 5분의 3 이상이 토론 종료에 찬성하거나 △국회 회기가 끝나면 자동 종료된다. 이 가운데 ‘살라미 전술’로 불리는 ‘회기 쪼개기’로 악용할 수 있는 세 번째 조항이 도마 위에 올랐다. 2019년 12월 선거법 개정 때 이런 편법이 처음 등장했다. 당시 민주당의 회기 쪼개기에 맞서 자유한국당은 회기 결정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신청했지만 문희상 국회의장이 수용하지 않았다.

무력화 전례가 있다 보니 검수완박 2개 법안의 필리버스터는 각각 7시간 안팎으로 싱겁게 종료됐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도록 설계한 것도 문제지만 중립을 지켜야 할 국회의장이 회기 쪼개기를 받아준 것은 더 큰 문제”라며 “문희상 국회의장(20대 후반기)과 박병석(21대 전반기) 국회의장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런 편법이 계속되면 앞으로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최장 기록(192시간)을 깰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필리버스터의 원조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DJ는 의원 시절인 1964년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에 대한 체포 동의안이 상정되자 5시간 19분 동안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당시 DJ의 활약으로 체포 동의안 처리는 무산됐으나 김 의원은 회기 종료 후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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