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기록의 나라다.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난중일기’ 등 20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갖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돼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 해인사에 고려 명종 때 작성된 ‘명종실록’도 보관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고려 시대에도 국초부터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됐고 해인사에 있었다던 실록 또한 임진왜란 이후 소실돼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역사를 기록한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는 궁궐 내 춘추관 등 ‘내(內)사고’와 전국 풍수 길지에 두는 ‘외(外)사고’ 등이 있었다. 조선 세종 때 ‘태종실록’을 편찬하기까지 내사고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고 충주·전주·성주의 사고가 정비돼 네 군데의 사고가 운영됐다. 임진왜란으로 세 군데 사고가 불타버리고 전주 사고만 화를 면했다. 당시 그만큼 백업에 충실했기에 지금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의 장대한 기록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 사고의 건축양식은 담장 안쪽에 2층 누각식의 기와 건물 2동 즉,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과 왕실 족보 등을 보관하는 선원각으로 이뤄졌다. 사고를 지키기 위해 조선 전기 충주 사고에는 관인 8명 정도가 머물렀고 후기에는 외사고가 산중에 지어져 스님들로 구성된 승군이 20인 내외, 강화 정족산 사고에는 50인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사고는 해인사 판전의 경우처럼 지면으로부터 습기와 열을 차단하고 오랫동안 기록물들을 보관하기 위한 장치들이 포함돼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에는 물리적 기록물로서의 책이 아닌 가상공간의 데이터들을 보관하기 위해 마치 공장처럼 거대한 저장소가 필요하다. 디지털의 최첨단에 선 데이터와 아날로그적 수단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물리적 구성체로서의 건축은 논리적인 모순을 가진다. 일부 글로벌 기업의 데이터센터는 어디에 있는지 그 장소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데이터센터는 서버가 설치된 장소와 네트워크를 24시간 관리하는 운영센터, 냉각 시설과 전력 공급 시설로 구성되고,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므로 일정 기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설비가 기본이다. 또 지진과 홍수와 같은 재해에 대비한 안전장치와 보안 시설이 필요하다. 특히 인공지능(AI) 산업의 급격한 발전에 따른 AI 데이터센터는 2035년까지 1600TWh(테라와트시)의 전력을 소비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전 세계 전력 사용량의 약 4.4%에 해당된다고 한다.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운영을 위해 필요한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시설들의 유치는 정치적인 이슈로는 환영받지만 환경적인 이슈가 될 때는 홀대받는다. 핵발전소에 버금가는 전력 사용과 온실가스 배출 등 공해 문제를 공격당하면 기업들은 풍력이나 태양광 등 친환경 에너지를 적용하겠다고 방어한다. 특히 과거의 기록이 아닌 동시대의 삶이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 공공 데이터센터는 기업처럼 선택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만큼 보다 정교한 백업 시스템으로 운영돼야 할 것이다.
전 지구인들의 기억이 빨려 들어가는 거대한 데이터센터, 인간보다 몇천 배 빠른 AI의 활동을 위한 무한한 전력, 그런 시설들을 유지하기 위한 친환경 건축을 제안하는 AI 렌더링 프로그램이 그려내는 화려한 투시도들. 그것들은 공간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 만족시킬 수 있을까. 역사 속의 사고와 달리 현재의 데이터센터는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몸집을 무한정 불려갈 수도 있다. 공간과 자연과 사람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정서적인 관계를 이해하고 돕는 것이 건축의 본질이라고 할 때, 데이터라는 새로운 존재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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