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의 끝
입력2026-01-30 17:42
지면 23면
대다수 중국인들은 비디오테이프를 아예 본 적이 없고 신용카드를 써본 적도 없다. 압축 성장 과정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건너뛰고 DVD로 직행해서다. ‘현금-신용카드-모바일 결제’ 중 ‘신용카드’도 생략하다시피 하고 모바일 결제로 넘어갔다. 이제는 어느 나라보다 완벽한 모바일 결제 인프라를 갖췄다.
중국보다는 덜하지만 우리도 유럽이나 미국 대비 한두 계단씩 빠르게 뛰어오른 사례다. ‘선진국’이라던 나라들이 이제는 선대의 유산에 간신히 기댄 듯 보일 정도로 한국의 발전은 빨랐다. 빠른 변화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컸지만 다행히 민주주의도 잊지 않았다. 가끔 대통령을 잘못 뽑았을 땐 기어이 국민의 손으로 끌어내렸다.
빠르게 계단을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계단 끝에서 마침내 부와 자유와 평화를 맞이할 것이라는 희망일 것이다. 조금 결은 다르지만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의 ‘역사의 종언’ 역시 그러한 기대를 담은 선언이었다.
그러나 계단의 끝은커녕 오히려 지금의 세계는 도로 계단을 내려가는 듯하다. 자유무역이 부정당하고 독재자들은 민주주의를 비웃고 있다. 사람들은 유튜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AI)이 보여주는 할루시네이션(환각) 속에서 점차 거짓에 익숙해지고 있다. 역사책 속으로 사라질 줄 알았던 전쟁은 다시 세계를 휩쓰는 중이다. 유엔은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할 판이다.
이 가운데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이달 20일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규칙 기반의 질서가 무너지고 강대국 간 대결이 격화되는 체제에서 중간 국가들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며 연대를 촉구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29일 관훈 토론회에서 카니 총리의 연설을 언급하며 “국내외에서 ‘좋아요’를 빨리 눌러야 되는 것 아니냐는 연락들을 받았지만 고민 끝에 ‘외교는 현실’이라는 답을 보냈다”고 했다. 꽤 높이 계단을 올랐으면서도 신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씁쓸한 고민을 삼키더라도 언젠가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나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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