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타기로 첫 업체 결정…“공선생 모르게” 증거인멸 정황도
■밀가루·설탕·전력 10조 담합
밀가루 메이저3사 인상폭 정하면
마이너 4사에 조직적으로 전달
설탕가격 과소반영해 이익 챙겨
주도자 대신 하위 직원이 처벌
20~30개월 뒤 승진인사로 혜택
檢 “담합범죄 법정형 더 높여야”
입력2026-02-02 18:02
수정2026-02-02 20:28
지면 5면
10조 원에 육박하는 담합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업체들은 공정거래위원회를 ‘공선생’이라고 칭하며 담합 구조를 교묘하게 설계하고 증거를 적극적으로 인멸하려고 시도했다. 기업 여러 곳이 담합을 성공시키기 위해 하나의 기업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담합 실주도자 대신 하위 직원이 실형을 받고 20~30개월 뒤 회사 계열사로 승진 인사로 복귀시키려고 한 ‘조폭식’ 인사 혜택도 준비한 것으로 확인됐다.
2일 검찰이 발표한 서민경제 교란사범 집중수사 결과에 따르면 밀가루 담합의 경우 시장 점유율 75%를 차지하고 있는 ‘메이저 3사’가 인상 폭을 선제적으로 논의해 결정한 뒤 ‘마이너 4사’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검찰은 기업들이 내부 회의 때 공정위를 ‘공선생’이라 지칭하며 “공선생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연락을 자제하자” 등의 대화를 나눈 텔레그램 메시지도 확보했다.
경쟁 당국의 담합 의심을 피해 범행을 적극적으로 은폐한 현황도 드러났다. 제분업체들은 최초 가격 인상을 제시하는 리스크를 담당할 제분업체를 ‘사다리타기’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2000원 올리겠다고 제시한 뒤 마지막에 500원 내리고 다른 곳은 1800원 올렸다가 300원 내리자”는 식으로 최종 인상 폭은 같되 담합 구조가 들키지 않도록 설계하기도 했다.
제당업체들은 2021년 2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설탕의 원재료인 원당 가격이 올라갈 경우 설탕 가격 인상에 반영하는 반면 내려갈 때는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수법을 공통적으로 활용했다.
나희석 부장검사는 “가격을 낮춘 부분은 악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며 “설탕 가격을 엄청 올렸다가 이후 과소 인하하는 과정에서 영업이익률이 폭발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담합을 주도한 상급자들의 ‘꼬리 자르기’ 시도도 포착됐다. 한 제당업체 임원은 직원에게 ‘당신과 회사의 관계는 일치한다’ ‘꼬리 자르기가 아니라 회사도 돕겠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하위 직원이 처벌을 받을 경우 30개월 혹은 그 이후 인사 협의를 하겠다는 취지의 대화도 이뤄졌다.
한전 입찰 담합에서는 업체들이 “담합 아닌 것이 어디 있나. 재수 없게 걸린 것” “의도적으로 모호한 주장을 해서 수사기관을 흔들어보자”는 취지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카톡 연락 금지, 문자 연락 금지, e메일 사용 금지, PC하드디스크 주기적 교체, USB 관리 철저, 폐기할 땐 망치로 때려서 배출 처리하라’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서로 공유하면서 담합 행위가 적발되지 않기 위해 철저히 대비했다.
이러한 담합 시도가 이뤄지는 동안 식료품 물가·전기료 상승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전가됐다. 담합 이전과 비교해 현재 밀가루 가격은 22.7% 오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담합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시기 밀가루 소비자지수는 36.12%로, 같은 시기 전체 물가지수 상승폭(17.06%)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
특히 이번에 재판에 넘겨진 기업들은 과거 공정위에 수차례 적발된 전례가 있지만 담합행위를 이어왔다. 검찰은 이에 대해 현재 담합에 가담한 개인에 대한 형사처벌이 지나치게 경미하다는 점을 이유로 지적했다. 미국의 경우 담합에 가담한 개인은 징역 10년 이하 100만 달러 이하의 벌금, 영국과 캐나다는 벌금형 상한선이 없다. 반면 한국의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2억 원 이하 벌금에 그친다. 나희석 부장검사는 “우리나라는 루마니아보다 못한 경쟁법 대응 체계를 갖고 있다”며 “담합 범죄의 법정형을 상향하는 내용의 개정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리니언시(자진신고 감면제도)의 보완 필요성도 제기됐다. 현재 검찰과 공정위 접수 창구가 일원적이지 않아 수사 시 혼선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은 검찰의 수사 결과에 대해 “검찰이 큰 성과를 냈다”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법정형 상한 개정 등 제도 보완 방안, 담합 업체의 부당이익 환수 방안, 부당하게 올린 물가 원상복구 방안 등 필요한 조치를 지시했다.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 서울경제신문,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