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듣기

  • 글자 크기

    글자 크기 설정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 기사 공유

  • 북마크

  • 다크모드

  • 프린트

네이버 채널구독

다음 채널구독

수사 빨리 받겠다는 기업

박성호 사회부장

경영 활동서 불확실성 감소가 중요

예측 가능하면 투자 진행 등 쉬워져

수사 길어지면 거래 비용 상승 필연

기업 가치 훼손에 기회 상실도 초래

입력2026-02-03 13:47

수정2026-02-04 00:06

지면 34면

“처벌도 부담이 되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수사가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결론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버텨야 한다는 게 가장 힘듭니다.”

사회부로 옮긴 뒤 평소 친분이 있던 한 기업 임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기업 수사와 관련된 주제가 나오자 그가 꺼낸 말이었다. 기업인을 수사하는 경찰·검찰을 취재하는 부서로 갔으니 기업의 사정도 조금은 헤아려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도 씁쓸함이 남았다. 짧은 대화였지만 “4~5년씩 수사를 받게 되면 경영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이 먼저 무너진다”는 말이, 기업들이 현장에서 체감하는 사법 리스크의 무게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6개월 이상 수사를 받고 있는 횡령·배임 사건의 장기 미제 피의자는 3075명으로 4년 전과 비교해 3배 가까이 급증했다. 문제는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의미하는 ‘시간’이다. 기업과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이다. 수익률이 낮아도, 규제가 까다로워도 예측 가능하면 투자는 진행되고 기업은 움직인다. 반대로 결론이 보이지 않는 환경에서는 책임 있는 의사 결정이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거래 비용 경제학에서는 시장이 가격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계약을 설계하고, 상대를 감시하고, 분쟁을 대비하고, 법률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이 거래나 투자에 포함된다. 이 이론을 체계화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올리버 윌리엄슨은 제도의 역할을 ‘거래 비용을 줄여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사가 장기화되면 기업의 거래 비용은 필연적으로 뛴다. 금융권은 기업 신인도를 문제 삼아 금리를 올리기도 한다. 거래처는 계약 조건을 강화하거나 물량을 줄인다. 내부에서는 법무·준법 대응이 경영의 중심이 되고 인수합병(M&A)과 신사업 등 투자는 보류된다. 법적 리스크가 기업의 거래 비용을 끌어올리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기업의 선택지는 뻔하다. 이는 경영진의 보수성 때문이 아니다. 불확실성이 비용으로 전환된 결과다.

더 답답한 대목은 이렇게 시간을 끌어 기소까지 갔는데도 끝이 허무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배임·횡령 사건은 무죄가 나오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다. 배임죄 무죄율은 6.7%로 전체 형사사건 평균 무죄율의 2배 수준이다. 장기간 수사와 재판을 거쳐 ‘결론은 무죄’로 끝나는 사례가 일반 사건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

기업에 가장 뼈아픈 손실은 실패가 아니라 기회 상실이다. 투자 실패는 장부에 손실로 남지만 기회를 놓친 시간은 기록되지 않는다. 글로벌 경쟁자들이 시장과 기술을 선점하는 동안 결론을 기다리는 기업은 출발선에 서보지도 못한 채 시간을 잃는다. 기업이 기회를 잃으면 투자가 줄고, 투자가 줄면 일자리와 신산업의 성장은 늦어진다. 거래 비용이 높아진 경제는 자연스럽게 보수화되고 이는 국가 전체의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는다. 개별 기업의 방어적 경영은 사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누적되면 한국 경제의 속도를 늦추는 구조적 요인이 된다.

물론 경제 범죄를 눈감아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핵심은 속도와 명확성이다. 유죄라면 신속히 처벌하고 무죄라면 명확히 종결해야 한다. 수년을 끌다 무죄로 끝나는 구조가 반복된다면 그 자체로 제도는 재점검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권은 경제 형벌 제도의 합리화를 공언해왔지만 처리는 지지부진하다.

게다가 10월 중대범죄수사청 출범과 검찰청 폐지 등 수사기관 개편이 본격화하면 현장은 한동안 더 혼란스러울 수 있다. 인력 재배치와 지원 시스템 변경, 업무 표준 정립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도가 바뀌는 과정에서 사건 처리가 더 느려진다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과 경제가 떠안게 된다.

지금 한국 경제에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이다. 장기 수사가 만들어내는 높은 비용은 기업의 기회를 빼앗고, 그 기회 상실은 결국 우리 경제의 손실로 돌아온다. 기업이 잃는 시간은 곧 한국 경제가 잃는 성장의 시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 서울경제신문,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다음
이전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