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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시대 최대 장애물은 배임죄

구경우 산업부 차장

입력2026-02-08 17:21

수정2026-02-08 19:00

지면 29면
구경우 산업부 차장
구경우 산업부 차장

2022년 여권의 한 인사는 “SK하이닉스(000660)는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고 평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경영진은 2020년 중국에 있는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을 약 10조 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자금난이 가중된 것이다.

당시 SK하이닉스의 현금성 자산은 약 5조 원. 자금이 부족해 국책은행 등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해당 인사는 농담처럼 “최 회장이 중국에서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인수 대금을 지급 못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얘기였다.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주도하는 SK하이닉스를 돌아보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어려운 재무 상황에서도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주역이 될지 예상하기 어려웠던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 수조 원을 쏟아부었다. 최 회장은 최근 HBM 개발 스토리를 담은 ‘슈퍼모멘텀’에서 “우리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길목은 최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선택해 수십조 원을 쏟아부어 얻은 자리다.

반도체 업계의 미래를 내다본 SK하이닉스 경영진이 투자한 막대한 자금이 코스피 5000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K하이닉스의 주가 상승 등을 통해 국민연금의 고갈 시기도 수년 이상 늦춰졌다. 미래를 내다본 기업인의 결단이 국민 경제에 미친 영향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그러나 길목을 잘못 택해 투자가 실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최 회장 등 경영진은 대대적인 수사에 시달리다 재판정에 섰을 것이다. 한국의 배임죄는 임무 위배, 재산상의 손해 발생 등과 같은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적법한 절차를 거친 경영 판단조차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 배임액이 50억 원 이상이면 최대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 기업인들이 큰 의사 결정을 할 때마다 “교도소 담장 위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 하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와 같은 미국 빅테크 창업자들이 한국에서 사업을 했다면 감옥 안에 있을 것이라는 소리도 우스개가 아니다. 아마존 주주들은 이사회가 우주사업을 벌이기 위해 설립한 블루오리진(Blue Origin)에 수십억 달러의 투자를 한 데 대해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미국 법원은 소송을 기각해 베이조스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이었다면 아마존 경영진은 배임죄의 덫에 걸려 미래 사업에 제동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배임죄가 없는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은 경영 사안을 형사처벌이 아닌 민사소송으로 다루기 때문에 경영진도 적법하다고 판단하면 베이조스처럼 과감한 투자에 나설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선언한 ‘국가 창업 시대’가 성공하려면 배임죄는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정상적인 경영 판단도 ‘걸면 걸리는’ 배임죄가 있는 한 창업가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기업가치 1조 원이 넘는 유니콘이 229개 생길 때 한국은 2개에 불과한 원인을 배임죄 같은 불합리한 제도에서 찾아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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