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시험 보느라 본업 뒷전”…정권따라 오락가락 공기업 경영평가
[공공기관부터 진짜 일 하자]
<6> 신뢰 잃은 경영평가
소수점 차이로 등급 갈리는데
정권마다 평가지표 대거 조정
“시키는 대로 했는데 결국 손해”
정부 정책 맞추다 재무악화도
“우수 기관은 평가 면제하거나
주기 2~3년 순환으로 조정을”
입력2026-02-12 05:30
지면 8면
총 342곳에 달하는 우리나라 공공기관 중 88곳의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은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매년 정부로부터 경영 평가를 받아야 한다. 교수와 회계사·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평가단은 100개 안팎에 달하는 세부 평가 지표에 맞춰 각 기관이 제출한 서류를 검토하는 것은 물론 직접 현장까지 방문해 경영 실태를 들여다본다. 탁월(S), 우수(A), 양호(B), 보통(C), 미흡(D), 아주 미흡(E) 등 6등급으로 나뉘는 평가 결과에 직원들의 성과급뿐 아니라 기관장의 운명까지 달려 있기에 공공기관 직원들은 평가 결과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처럼 공공기관의 사활을 좌우하는 경영 평가 지표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점이다. 11일 재정경제부의 ‘2026년 공공기관 경영평가편람’에 따르면 공기업 평가 지표 중 ‘안전 및 책임경영’ 등 사회적 가치와 관련된 항목의 배점은 18.5점으로 2025년 14점 대비 4.5점 늘었다. 특히 산업재해 예방 분야의 점수가 0.5점에서 2.5점으로 크게 높아졌다. 대신 ‘재무 성과 관리’ 분야의 총배점은 21점에서 15점으로 하향 조정됐다. 근로자의 안전을 중시하는 이재명 정부의 기조가 반영된 것이다. 소수점 차이로도 등급이 갈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한 조정 폭이다.
공공기관들은 이 같은 일이 정권 교체 시기마다 반복됐다고 하소연한다. 실제 ‘사회적 경제’가 강조됐던 문재인 정부 초에 정부는 공공기관 경영평가 지표의 ‘사회적 가치’ 배점을 5점에서 22점으로 대폭 올렸다. 당시 공공기관 조달품의 5%와 3%를 각각 여성 기업과 사회적 기업으로부터 공급받도록 한 평가 항목을 지키느라 규모가 큰 대형 공기업들은 골머리를 앓았다는 후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효율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사회적 가치 분야의 총배점을 다시 15점으로 낮추고 경영 효율, 재무 성과, 인사관리와 관련된 분야의 배점은 12점에서 22점으로 끌어올렸다. 공기업의 방만 경영을 바로잡겠다는 취지지만 정부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느라 재무 상태가 악화된 기업들까지 경영 평가가 떨어지면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손해 봤다”는 불만이 나오곤 했다.
전문가들은 공공기관 평가가 처음 시작된 1983년 이래 정권마다 평가 항목만 덧대지다 보니 지표가 누더기가 됐다고 지적한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투명성이 떨어지던 시대에는 공공기관 경영 평가가 제 역할을 했다”면서도 “이제는 평가를 받기 위해 별도의 조직이 만들어지는 등 비효율적인 관행이 생기는 모습이 보인다”고 우려했다. 연구개발(R&D) 업무를 담당하는 공공기관의 한 관계자는 “평가 서류만 수백 쪽에 달하다보니 행정 소요가 상당하다”며 “경영 평가를 받느라 현장 업무를 못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각 정부가 국정과제 달성에 공공기관을 동원하기 위해 경영 평가를 ‘목줄’로 쓰는 관행도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오승호 상명대 명예교수는 “공공기관이 정부 정책을 수행하는 곳이니 어느정도 평가 지표에 정책 목표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면서도 “핵심은 이를 어느정도 비중으로 하느냐”라고 강조했다. 국정과제 관련 지표의 배점이 과도해져 평가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면 경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 에너지 공기업 관계자는 “정권마다 새로 지표에 반영하는 정책들은 수년이 지나야 성과가 나는 경우가 많다”며 “꾸준한 투자로 결과물이 나올 때쯤 지표가 바뀌니 기관으로서는 과감히 나서기도 어려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공공기관 내부 사정을 면밀히 알기 어려운 외부인들이 두세 달에 걸쳐 평가하는 상황에서 정성 평가 비중이 너무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재경부에 따르면 공기업 평가 지표에서 비계량 지표가 차지하는 비중은 52.5~58.5%인 것으로 나타났다. 공기업 관계자는 “세부 평가 항목으로 들어가면 비슷한 상황의 두 기업이 다른 점수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이렇다 보니 기관들은 평가단을 의전하는 데 각별히 신경 쓰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평가 주기를 늘리고 항목을 단순화하는 등 공기업 평가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오승호 상명대 명예교수는 “평가 준비 자체가 본업을 압도하는 등 평가 대응에 투입되는 인력·행정 부담이 적지 않다”며 “유형별로 구분해 2~3년에 한번 순환 평가를 받는 방법 등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준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평가 결과가 높은 기관은 면제하는 방식도 가능하다”며 “규모가 작은 기관은 평가의 실익이 적으므로 부처 평가로 돌리는 등 평가 대상을 줄일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문광민 충남대 행정학 교수 역시 지난해 발간한 논문에서 “정부 기업을 평가할 때 한국은 단기적 성과관리와 직접적 책임 확보에 중점 두는 반면 미국은 장기적 품질 보증과 조직학습을 살핀다”며 “한국도 평가 주기와 방식을 다원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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