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AI칩 실기 3년, 엔지니어가 되찾았다…삼성 ‘HBM4’ 역전 서사
■서종‘갑 기자’의 갭 월드(Gap World) <41>
충남 천안서 엔비디아행 HBM4 첫 출하
AI칩 개화 시기 오판 ‘실기’ 딛고 부활
SK하이닉스 독주 깨고 기술 패권 탈환
입력2026-02-13 07:00
수정2026-02-13 10:39
12일 충남 천안시 서북구 삼성전자(005930) 천안캠퍼스. 이른 아침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 라인이 위치한 이곳의 공기는 평소와 다른 팽팽한 긴장감과 활기로 가득 찼다. 대형 무진동 트럭 적재함 덮개에 적힌 ‘세계 최초 HBM4 양산 출하’라는 문구가 아침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빛났다.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정문을 빠져나가는 트럭을 바라보는 삼성전자 임직원들의 표정에는 안도와 자부심, 비장함이 교차했다. 이날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인공지능(AI) 가속기 ‘베라 루빈’에 탑재될 6세대 HBM(HBM4) 양산 물량을 세계 최초로 출하했다. 지난 3년간 경쟁사에 HBM 주도권을 내주며 겪었던 ‘수모의 역사’를 끝내고 기술 초격차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을 쏜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날 천안캠퍼스에서 패키징을 마친 HBM4 완제품을 엔비디아로 보냈다. 통상 반도체 전공정(웨이퍼 생산)은 평택이나 화성에서 이뤄지지만 HBM의 핵심인 적층과 패키징 등 후공정은 이곳 천안캠퍼스에서 최종 마무리된다. 천안을 떠난 이 트럭은 단순한 물류 이동을 넘어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다시 뒤집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업계 관계자는 “단순한 제품 공급이 아니라 지난 3년여간 무너졌던 자존심을 회복하고 다시 1등으로 올라서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평했다.
효율 강조한 컨트롤타워의 오판
뼈아픈 ‘잃어버린 3년’의 대가
삼성전자의 HBM 역사는 영욕의 세월이었다. 원인을 찾자면 시계를 2019년으로 되돌려봐야 한다. 당시 반도체 시장은 슈퍼 사이클이 끝난 뒤 찾아온 다운사이클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D램 가격은 곤두박질쳤고 재고는 산처럼 쌓였다. 당시 삼성전자의 의사결정 라인은 기술보다는 관리와 효율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김기남 당시 DS부문장(부회장)과 그룹의 컨트롤타워 격인 사업지원TF를 이끄는 정현호 부회장의 체제 하에서 삼성은 전사적인 원가 절감과 수익성 방어에 올인했다.
그 불똥은 HBM으로 튀었다. 당시 HBM은 기술적으로 훌륭하지만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다. 사업지원TF의 철저한 효율성 중심 기조와 DS부문의 단기 실적 압박이 맞물리며 경영진은 HBM 전담팀을 축소하고 인력을 범용 D램 부서 등으로 재배치하는 결정을 내렸다. 미래를 내다본 기술 투자보다는 당장의 재무제표를 중시한 ‘재무통’들의 판단이 낳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그 틈을 경쟁사인 SK하이닉스(000660)가 파고들었다.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가 주춤하는 사이 HBM 연구개발(R&D)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2022년 챗GPT 등장으로 AI 붐이 터지자 SK하이닉스는 HBM3 시장을 선점하며 엔비디아의 독점 공급 파트너가 됐다. 삼성전자는 뒤늦게 추격에 나섰지만 한 번 벌어진 기술 격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안팎에서 “기술의 삼성은 어디 가고 관리의 삼성만 남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전영현의 등판과 ‘기술’로 회귀
4나노 파운드리와 메모리 결합
반전의 계기는 지난해 5월 구원투수로 등판한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의 결단이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반도체 신화의 주역인 전 부회장은 취임 직후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이는 재무 논리에 밀려난 기술 리더십을 복원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과거의 실책을 인정하고 경쟁사를 따라잡는 데 급급했던 ‘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과감히 수정했다. 이미 격차가 벌어진 HBM3E(5세대) 개량에만 매달리기보다 판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차세대 규격인 HBM4를 선제적으로 개발해 시장의 ‘룰’을 바꾸겠다는 승부수를 띄웠다.
전 부회장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이날 출하된 HBM4는 삼성전자가 메모리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사업을 동시에 영위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이기에 가능한 괴물 스펙을 자랑한다. 삼성전자는 HBM의 두뇌 역할을 하는 베이스 다이(Base Die)에 4나노미터(㎚·1㎚=10억 분의 1m) 초미세 파운드리 공정을 적용했다. 경쟁사가 메모리만 만들고 베이스 다이는 외부 파운드리에 맡겨야 하는 것과 달리 삼성은 자체적으로 설계와 생산을 최적화해 성능과 효율을 극대화했다. ‘원팀 삼성’의 시너지가 제대로 발휘된 것이다.
성능은 압도적이다. 이날 공개된 삼성전자 HBM4의 동작 속도는 초당 최대 13Gb(기가비트)다. 당초 업계가 예상했던 11.7Gbps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 표준인 8Gbps보다 46% 빠르고 전작인 HBM3E(9.6Gbps)와 비교해도 35% 이상 향상됐다. 데이터가 오가는 통로인 대역폭은 초당 최대 3.3TB(테라바이트)로 늘었다. 이는 1초에 풀HD급 영화 수백 편을 전송할 수 있는 속도다. 고객사인 엔비디아가 요구한 스펙을 웃도는 성능을 구현하며 기술적 우위를 확실히 증명했다.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받았던 발열과 전력 효율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삼성전자는 칩 사이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전극을 연결하는 실리콘 관통 전극(TSV) 기술을 고도화하고 전력 분배 네트워크(PDN)를 최적화했다. 이를 통해 전력 효율은 전작 대비 40% 개선됐고 발열 제어 능력도 30% 좋아졌다. AI 데이터센터의 최대 고민인 전력 비용 절감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여 고객사들의 반응도 뜨겁다.
커스텀 HBM으로 격차 굳히기
HBM3E에서는 좀처럼 삼성전자에 오케이 사인을 주지 않던 엔비디아가 이번에는 먼저 손을 내밀기도 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삼성전자의 HBM4 샘플을 테스트한 뒤 양산 일정을 앞당길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 하반기 출시될 엔비디아의 야심작 베라 루빈 그래픽처리장치(GPU) 1개에는 삼성전자의 36GB(기가바이트) HBM4 8개가 탑재된다. 특히 주력 제품인 랙 시스템 ‘베라 루빈 NVL72’에는 GPU 72개가 들어가는데 여기에 필요한 HBM4 수량만 576개에 달한다. 업계 추정치인 개당 600달러(약 86만 원)를 적용하면 시스템 1대당 HBM4 비용만 34만 5600달러(약 5억 원) 규모다.
삼성전자의 시선은 이미 다음 전장을 향해 있다. 범용 제품을 넘어 고객사의 입맛에 맞춘 ‘커스텀(Custom) HBM’ 시장이다. 구글과 AMD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들은 엔비디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자체 AI 반도체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사 칩에 최적화된 맞춤형 메모리다. 삼성전자는 HBM4 양산과 동시에 하반기 개량형인 HBM4E 샘플을 내놓고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커스텀 HBM 시장에 뛰어든다. 메모리 설계부터 파운드리 생산 패키징까지 한 번에 제공하는 턴키(Turn-key) 솔루션이 삼성의 가장 큰 무기다. 삼성전자 내부 테스트 결과 커스텀 HBM은 범용 제품 대비 2~3배 높은 성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는 이번 HBM4 천안 출하가 삼성전자의 ‘잃어버린 3년’을 되찾는 결정적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본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HBM4는 삼성전자가 전작에서 경쟁사에 시장을 빼앗긴 후 절치부심하고 성능으로 다시 승부수를 던진 결과물”이라며 “재무적 논리가 아닌 기술적 논리로 돌아온 삼성전자가 턴키 역량을 앞세워 엔비디아뿐 아니라 빅테크들의 러브콜을 휩쓸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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