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차냐 기후냐… 유권자의 선택은
입력2026-02-17 14:00
※석유(Petro)에서 전기(Electro)까지. 에너지는 경제와 산업, 국제 정세와 기후변화 대응을 파악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기사 하단에 있는 [조양준의 페트로-일렉트로] 연재 구독을 누르시면 에너지로 이해하는 투자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온실가스 ‘위해성 판단’을 폐기하며, 이를 통해 자동차 가격 인하와 규제 비용 절감을 내세운 ‘민생·물가 잡기’ 선거 전략을 본격화했습니다.
△전기차 보조금 폐지에 이은 이번 조치로 미국 내 ‘빅 3’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사업을 축소하는 등 화석연료와 내연기관 중심의 산업 재편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경제적 실리를 기대하는 유권자층이 있는 반면, 기후 위기 인식 확산과 주 정부 및 국제사회의 법적·과학적 반발이 거세어 이번 결정이 11월 중간선거의 최대 변수가 될 전망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이산화탄소와 메탄 등 온실가스가 미국인의 건강과 복지를 위협한다고 내렸던 판단을 폐기했습니다. 최소한 미국 연방 차원에서는 온실가스를 더 이상 규제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지 않기 시작한 겁니다.
이번 결정은 산업과 에너지 분야뿐 아니라 기후변화 대응 같은 환경, 또 정치와 사회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데요. 왜 이 시점에서 조치가 내려졌는지 또한 눈여겨 볼 필요가 것 같습니다. 온실가스 ‘위해성 판단(endangerment finding)’ 규정 폐기는 트럼프 행정부가 올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던진 선거 운동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죠.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정책이 미국인들의 선택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외면을 당할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온실가스 규제 근거 폐기... 전기차 치명타 입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12일(현지 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직접 위해성 판단 폐기를 발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전 정부가 도입한 위해성 판단은) 미국 자동차 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미국 소비자들에게 엄청난 가격 인상을 초래한 재앙적 정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조치로 1조 3000억달러 이상의 규제 비용이 사라져 자동차 가격이 급격히 하락할 것”이라며 “신차 가격은 1대당 3000달러(약 433만 원) 저렴해질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서 몇 가지 키워드를 발견하셨을 것 같은데요. 먼저 ‘자동차’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 바이든 전 행정부가 도입했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상 구매 보조금을 지난해 전격 폐지하는 등 전기차에 매우 불리한 정책을 펴고 있죠. 온실가스 위해성 판단 폐기는 전기차 산업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것으로 전망됩니다. 전기차가 온실가스를 내뿜지 않기 때문에 등장한 것인데, 온실가스가 위해하지 않다면 굳이 전기차를 탈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트럼프 행정부의 전기차 축소 정책은 미국 완성차 ‘빅 3’인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 스텔란티스가 잇따라 전기차 사업을 대거 축소하고 에너지저장장치(ESS) 배터리로 전환에 나서는 등 이미 미국 내 전기차 산업 지형을 재편하고 있죠. 미국 자동차 업계의 재편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관측됩니다.
기후 정책? 선거 전략?
두 번째 키워드는 ‘민주당’, 그리고 ‘3000 달러’가 될 것 같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변화 부정론자입니다. 온실가스 규제 근거를 폐기한 이번 결정은 기후변화는 ‘녹색 사기’이며, 따라서 화석연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와 정확히 일치하죠. 그런데 왜 지금 시점에 온실가스 규제 근거를 없앴을까요. 이는 올 11월 중간선거와 관련성이 높아 보입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높아지는 전기요금 때문에 수세에 몰렸습니다. 미국 내에서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연이어 취소하고, 관련 보조금을 대폭 삭감한 여파로 말이죠.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대로 전력 수요가 높아지고 있는데, 전체 발전량의 최대 30%를 차지하는 재생에너지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아 벌어진 현상입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요즘 ‘생활비 부담(어포더빌리티, Affordability)’이 큰 현안으로 떠오른 상황입니다. 민주당은 ‘트럼프 행정부가 일방적인 에너지 정책으로 민생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며 공세를 펼치고 있죠.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어포더빌리티라는 말은 민주당이 만들어낸 가짜 용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용카드 이자율 최대 10%로 제한 △관세 수입을 활용한 1인당 2000달러(약 290만 원) 현금 지원 등 민생 정책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기도 하죠. 물가 문제가 ‘선거 이슈’로 부각되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온실가스 위해성 판단 폐기는 트럼프 행정부가 빼든 ‘물가 정책’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시도가 성공을 거둘지, 아니면 실패로 돌아갈지 여부가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앞으로 지켜봐야 하겠습니다만, 유권자 입장에서는 당장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새 차를 장만할 수 있다는 점에 솔깃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 연료 가격이 낮을 수록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미 스탠포드대 존 크로스닉 소장을 비롯한 연구진이 1976년 1월부터 2007년 7월까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미국에서 휘발유 가격이 10센트 상승할 때마다 대통령 지지율이 0.6%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해 휘발유 가격이 낮아지면 대통령 지지율은 상승한다는 뜻이겠죠. 현재 국제 원유 시장이 과잉 공급 우려에 휩싸인 영향으로 미국 휘발유 가격은 지난달 갤런당 평균 2.79달러까지 하락하며 5년 만에 최저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원래보다 몇 백만원이나 자동차 가격이 떨어진다면, 내연차 구매의 매력도가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트럼프 행정부가 자동차 매연이 내뿜는 질소산화물 등 일반 대기오염물질은 여전히 규제한다는 입장이기도 하죠. ‘내연차 구매가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부담감을 덜어내는 효과를 내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가냐, 기후변화냐’ 미국 유권자의 선택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존재하지 않는 키워드 또한 발견하셨을 것 같은데요. 바로 기후변화입니다. 온실가스 위해성 판단 폐기가 ‘물가 공약‘이라면, 트럼프 행정부 선거 승리의 반대 급부가 ‘기후변화 대응 포기’가 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온실가스 위해성 판단 폐기는 국내는 물론 국제 사회에서도 강한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당장 트럼프 행정부가 각종 소송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점치고 있고요. 미국 내 최대 전기차 시장인 캘리포니아 포함 주(州) 정부들이 연방 정부의 지침을 거부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죠. 실제로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온실가스 위해성 판단 폐기가 발표된 직후 자신의 소셜미디어 엑스(X)에 “(트럼프 행정부는) 수십 년간 공중 보건을 보호해온 과학적 증거를 외면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 고민해봐야 하는 점은 기후변화에 대한 미국 내 인식입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기후변화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지난해 3월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성인 10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48%가 ‘지구 온난화가 당신의 생애 동안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이는 역대 최고였던 2023년 46%보다 더 높아진 수치인데요. 물론 여전히 50% 이상이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에 동의하지 않고 있지만, 기후변화를 부정하거나 무시해도 될 만한 존재로 여기는 분위기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물가냐, 아니면 기후변화냐. 미국 유권자들의 선택은 미국에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다른 많은 국가에서도 기후변화 피해에 대한 위기 의식이 높아지는 가운데 막대한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 감축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현실론 역시 커지고 있기 때문이죠. 앞으로 상황을 계속 주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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