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는 친구, 허무는 친구…꼭 봐야 할 조각가 전국광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기획전
‘요절 조각가’ 전국광 특별 조명
중력 드러낸 ‘적’ 시리즈부터
열린 조각 향한 ‘매스의 내면’
입력2026-02-18 09:14
수정2026-03-03 08:57
주변에서는 그를 ‘쌓는 친구’라 불렀다. 돌·나무·금속 같은 전통적 조각의 단단한 재료를 쌓아올렸으나 마치 종이·헝겊·반죽 같은 부드러운 재료인 것처럼 늘어지고 주름지기도 한 형태의 작품을 두고, 작가는 쌓을 ‘적(積)’ 자의 ‘적’ 시리즈라 불렀다. 1970년대를 ‘적 시리즈’로 관통한 작가는 1980년대 들어 쌓은 것들의 무게감을, 조각 특유의 육중함을 벗어나고자 했다. 쌓아올린 것들을 과감히 허물고자 결심한 자신을 두고 작가노트에 ‘허무는 친구’라 적은 조각가 전국광(1945~1990)이다.
한국 추상 조각의 전개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세운 조각가 전국광을 주인공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전시에 ‘전국광: 쌓는 친구, 허무는 친구’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지난해 9월24일 개막해 오는 22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전성기였던 45세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작가를 국공립미술관이 처음으로 조명한 자리라 더욱 특별하다. 미술관 앞뜰 야외조각 전시장에 놓인 6점을 포함해 조각과 드로잉, 대형 조각에 앞서 작은 입체 모델을 초안 형식으로 제작한 ‘마케트’ 등 100여 점이 선보였다.
전시장 앞머리에 놓인 ‘제목미상’의 작품은 ‘전국광’이라는 이름을 빛 바랜 누런 종이에 잔뜩 적어 쌓아올린 형태다. 석고 조각이지만 꼭 종이처럼 휘고 굴곡진 형태다.
“쌓음, 쌓음을 당함으로 해서 판제 점토가 스스로 구부러지거나 팽창되어지며 이루는 형상, 이 ‘이뤄짐을 지켜보며’ 나는 그제서야 주문을 외워야 될 차례가 됨을 안다. 바라는 바 다만 거짓없이 있는대로 드러나도록 해 주사이다. 어쨌건 이렇게 해서 쌓고, 본다.” (전국광 작가노트 중에서)
크게 4개 섹션으로 나뉜 전시의 1부는 1970년대부터 주로 선보인 ‘적’ 시리즈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전국광의 쌓기는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인 ‘중력’을 드러낸다. 그래서 돌덩이를 깎거나 섬유강화플라스틱(FRP)으로 제작했지만 아래로 축 쳐진 모양이다. 1988년작 ‘휴식’은 하나의 돌덩이를 깎아 만든 것인데, 추상조각인데도 소파에 기대 쉬는 듯 축 늘어진 휴식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전국광은 아버지의 부재,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할아버지의 소개로 15살에 기념조각을 제작하던 박재소를 만나 조각에 입문했다. 1세대 여성 조각가 윤영자(1924~2016), 추상 조각가 박석원(83)의 작업 보조로 조각의 기본기를 익힌 상태로 1967년 홍익대 조각과에 입학했다. 1969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상을 받기 시작했다.
1981년작 ‘매스의 비(碑)’는 그해 국전 비구상부문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양감, 덩어리감을 일컫는 매스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매스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겼다. 이후 1980년대 ‘매스의 내면’ 연작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전환점이기도 한 대표작이다. 매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전통 조각 재료 외에 철사, 아크릴, 점토, 종이, 나뭇가지 등 다양한 재료를 실험했다.
흰 벽 모서리에 붙은 거대한 검은 거미같이 생긴 작품은 ‘매스의 내면-자력-0.027㎥’이다. 작품을 구성하는 숯처럼 새카만 각목 하나의 길이는 30㎝인데, 차곡차곡 쌓으면 가로·세로·높이 30㎝의 큐브를 이룬다. 작품 제목의 0.027㎥는 재료들의 부피를 뜻하는 것. 각목의 연결부가 접히고 펴지는 형태라, 작품은 양쪽 벽을 딛고 선 구조로 공간에 맞춰 다양하게 설치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매스를 허무는 실험을 이어가던 전국광이 도달한 유연한 조각, 열린 조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족의 도움으로 처음 공개된 작업노트를 비롯한 아카이브, 미니어처를 보는 듯 흥미진진한 30여점의 마케트는 특별한 볼거리다. 미술애호가인 BTS의 알엠(RM)은 시(詩)와 언어유희를 좋아했던 전국광이 원고지에 끄적인 단어들을 사진찍어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게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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