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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중견국 외교

임종건 언론인·전 서울경제신문 부회장

‘패권국에 순응’으론 안전 보장 못해

중견국끼리 생존의 길 찾는 게 해법

韓, 미중 넘어 지구적 연대·협력해야

입력2026-02-20 05:00

수정2026-02-20 05:00

지면 31면
임종건 언론인·전 서울경제신문 부회장
임종건 언론인·전 서울경제신문 부회장

캐나다는 미국과 형제처럼 살았다. 땅덩이는 미국보다 커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 2위를 차지하지만 대부분 동토 지역이어서 생활 면적은 적고 인구도 미국의 8분의 1에 불과한 4100만 명이다. 미국과 함께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미국이 독립할 당시 영국 충성파와 프랑스계 이민자들이 주축이 돼 세운 영연방국의 하나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라면서 총리를 총독이라고 하대했을 때 캐나다인이 느꼈을 자존심의 손상은 이해하고 남음이 있다. 그것은 살던 집을 내놓고 곁방살이를 하라는 얘기나 같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모욕적인 공세가 한창이던 지난해 3월 트럼프에 대한 대항마가 돼달라는 국민적 기대를 모으며 선출됐다. 올해 1월 20일 그가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연단에 섰다.

여러 유럽의 지도자들이 다보스포럼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독단적인 정책에 불만을 토해냈다. 카니 총리도 그중 하나였으나 연설 속에서 미국이나 트럼프의 이름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의 연설은 세계가 혼란을 느끼고 있는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어떻게 혼란을 극복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로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지금은 전환기가 아니라 ‘파열(Rupture)’의 한가운데를 통과 중”이라면서 “좋았던 시절은 갔고 강대국 간의 지정학이 제멋대로인 잔혹한 현실이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당할 일을 당한다”는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의 예언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고 했다.

많은 나라들이 강자에 대한 순응이 안전을 보장해줄 것으로 믿으며, 타협하고 문제를 피하려 해서는 이 파열의 시대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여기서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중견국 사이의 연대와 협력 개념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 패권국을 상대로 할 때 서방을 비롯한 여타 지역의 개별 국가들은 중견국에 지나지 않는다. 중견국들이 패권국을 개별적으로 상대해서는 무력할 뿐이라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후 보여주는 국제 관계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 베네수엘라 사태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그는 대세 순응주의의 잘못된 예로서 1978년 체코의 반체제 인사 바츨라프 하벨의 에세이 ‘무력한 자들의 힘(The power of the powerless)’에 나오는 채소 장수의 행위를 들었다. 채소 장수가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선전 문구를 창에 붙인 것은 그 문구를 믿어서가 아니라 무난히 살기 위해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체제는 폭력에 의해서만 아니라 거짓임을 알면서 따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유지된다”면서 “채소 장수가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항거할 때, 즉 창문에서 문구를 떼어 버릴 때 현상은 깨진다”고 했다.

패권국이 적용하는 국제규범이 부분적으로 거짓이고 예외를 두고 불균등하게 집행하는 사례를 알면서도 패권국이 제공하는 것이 공공재라고 합리화하면서 패권국이 요구하는 문구를 창문에 붙여 온 것이 이제까지의 관행이었다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가장 먼저 모욕을 당한 캐나다가 중견국의 맨 앞장에 서서 생존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은 일견 당연하다. 카니 총리는 지난 6개월간 4개 대륙에서 12개의 무역협정을 체결했다고 했다.

지난달 그는 중국을 방문해 서방국가로서는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문제를 논의했다. 올 들어 유럽과 중국 간에 정상회담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카니 총리의 방중을 전후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다녀갔고 이번 달에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중국을 방문한다. 이와 별도로 유럽연합(EU)는 남미경제협력체(메르코수르) 및 인도와 FTA를 체결했다. 미국과의 무역마찰이 상수로 등장한 것에 대비한 카니 식의 생존 전략이지만 자칫 미국이 왕따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그냥 둘 리 없다.

중국과 FTA를 맺으면 캐나다산 수입품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트럼프의 협박에 카니 총리는 협정 재고 입장을 밝혔다. 그가 제안한 중견국 해법의 한계라고 하겠지만 서방의 대응에 미국도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도 된다. 중견국으로서 한국의 위치는 어디일까.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른바 ‘안미경중’의 정중앙에 위치한 한국은 유럽 국가들보다 정교한 외교를 해야 한다. 미중과는 물론 유럽·동남아·인도·메르코수르·아프리카 등 전 지구적으로 연대와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관훈클럽 토론에 나와 카니 제안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한미 안보의 중요성을 의식한 탓이겠지만 관세와 북핵에 대한 트럼프의 오락가락 정책을 보면 한국이 미국에 캐나다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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