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위기 이후의 기회
■김지엽 KOTRA 중남미지역본부장
세계최대 원유 묻힌 북중미 요충
인프라 재건 등 K기업에도 기회
네트워크 구축으로 전략적 접근을
입력2026-02-23 05:00
수정2026-02-23 05:00
지면 29면
석유 양을 나타내는 단위는 BPD(Barrels Per Day)로 하루 동안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양을 의미한다. 전 세계 석유 수요는 1억 BPD를 조금 넘는데 이 가운데 최대 석유 소비국인 미국이 하루에 2000만 배럴을 소비한다. 최대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한때 300만 BPD에 달했으나 우고 차베스 집권 후 서방의 제재, 생산 설비 노후화와 투자 부족으로 꾸준히 줄어들면서 최근에는 80만 BPD 정도로 알려졌다. 300만 BPD면 어느 정도일까. 유가를 배럴당 100달러로 계산하면 하루에 3억 달러, 1년이면 1095억 달러가 된다. 우리나라의 수출 주력 품목인 반도체 수출액이 지난해 역대 최대인 1700억 달러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감이 올 것이다.
석유산업 비중이 절대적인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1980년대 후반 유가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89년 정부 보조금 축소 등 경제정책의 급격한 변화는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고 그 결과 1998년에는 ‘서민’의 지도자를 내세운 차베스 정권이 들어섰다. 차베스 정권은 ‘21세기형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식량과 생필품·휘발유를 국가 차원에서 수입해 국민들에게 거의 무상으로 공급했다. 그러나 해외 석유 기업 지분을 국영화하는 과정에서 석유 시설에 대한 자본 투자가 줄어들고 일부 기술 인력까지 해외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산업 내 자본과 인적자원의 변화는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량이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된 주요인이다.
하루에 약 700만 배럴의 석유를 수입하는 미국에 인근국인 베네수엘라 석유는 전략적 가치가 클 수밖에 없다. 베네수엘라 석유는 대부분 초중질유로 채굴 비용이 높고 환경오염 우려가 큰 편이며 채굴과 운송에는 나프타 같은 희석제와의 혼합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멕시코만에 초중질유 처리 시설을 완비하고 있어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진다. 이에 따라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한 상황에서도 미국은 석유 자원의 안정적 수급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해상을 관리하는 한편 자국의 석유 메이저 기업들이 베네수엘라 에너지산업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투자도 독려하고 있다.
‘월드 에너지 2023’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원유 매장량은 3038억 배럴로 세계 1위 수준인 만큼 경제 재건의 기반은 충분하다. 오랜 경기 침체로 전성기에 비해 구매력이 낮아진 상태지만 향후 석유산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고 외환 수급이 안정화되면 중남미 내 독보적인 성장성을 지닌 시장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석유산업 정상화와 인프라 재건이 본격화될 경우 설비·기자재·엔지니어링을 포함한 한국의 산업재 수출 역시 점진적으로 확대될 여지가 있다.
세계 최대 수준의 원유 매장량과 2800만 명에 달하는 인구, 북중미를 연결하는 전략적 거점에 위치한 베네수엘라는 중남미 국가 중에서도 성장 잠재력이 큰 나라다. 특히 노후화된 정유 설비의 현대화와 미뤄져온 대규모 국가 인프라 재건 사업은 석유·플랜트 및 연관 산업에서 기술력과 경험을 보유한 우리 기업에도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베네수엘라는 시장 개방 가능성이 높은 만큼 선제적 정보 축적과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 서울경제신문,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