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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시대, 임신부 고혈압 치료는 충분한가

박현영 노원을지병원 심장내과 교수·전 보건연구원장

산모·태아 생명직결 중대 질환인데도

약 충분치 못하고 ‘금기’ 표현도 문제

안전한 임신·출산, 국가가 책임져야

입력2026-02-24 05:00

수정2026-02-24 05:00

지면 34면
박현영

박현영

국립보건연구원장

박현영 노원을지병원 심장내과 교수·전 보건연구원장
박현영 노원을지병원 심장내과 교수·전 보건연구원장

임신 12주를 조금 넘긴 32세 여성이 남편과 함께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료실을 찾았다. 여러 번의 난임 시술 끝에 어렵게 임신에 성공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혈압은 160/95mmHg로 높았고 맥박도 분당 120회로 빨랐다.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위험이 될 수 있어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지만 의료 현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약은 많지 않다.

임신 중 고혈압은 단순한 혈압 상승을 넘어 산모와 태아의 생명에 직결될 수 있는 중대한 질환이다. 조산, 태아의 성장 지연, 자간증, 뇌출혈 등 치명적인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 적절한 약물 치료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임신 중 고혈압은 전체 임신의 약 5~10%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최근에는 고령 임신과 난임 시술 등으로 인한 다태임신이 늘면서 그 빈도가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다.

지난해 고혈압학회 발표에 따르면 약 3만 명 내외의 임신부가 고혈압성 질환으로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공중보건 문제다. 해외에서는 라베타롤·니페디핀·메틸도파가 임신 중 고혈압의 표준 치료제로 널리 쓰인다. 이 중 라베타롤은 오랜 기간 사용돼 안전성 자료가 충분하고 맥박을 낮추는 효과가 있어 심장이 빨리 뛰는 환자에게 적합하다. 실제 임신부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고혈압 약제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경구용 라베타롤이 정식으로 판매되지 않는다. 응급 상황에서 사용하는 주사제는 있지만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알약은 시판되지 않기 때문에 환자에게 투여하기 위해서는 희귀의약품센터를 통해 별도로 신청하고 심사를 받아 수입해야 한다. 이 과정에는 몇 주 이상이 걸리며 환자와 의료기관 모두 시간적·행정적 부담을 떠안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시장성이 낮기 때문이다. 일반 고혈압 환자는 1000만 명이 넘지만 임신 중 고혈압 환자는 약 3만 명 수준에 불과하다.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허가와 유통에 드는 비용에 비해 수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결국 기업은 도입을 꺼리고 현재 정부는 이를 강제하거나 유도할 제도가 없다. 그 결과 약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고 그 불편과 위험은 산모와 태아에게 돌아간다.

임신 중 고혈압 치료는 환자 수는 적지만 생명과 직접 연결된다는 점에서 희귀질환 치료와 비슷한 공공성을 가진다. 우리나라에는 필수의약품 제도가 있어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꼭 필요한 약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돼 있다. 그러나 ‘대체 약이 있다’는 이유로 특정 약이 목록에서 빠지면 실제 현장에서 필요한 선택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약물은 단순한 기능적 대체가 아니라 환자의 상태와 위험 요인을 고려한 맞춤 선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일부 고혈압 약제는 해외에서 임신부에게 사용되고 있음에도 국내 허가 문서에는 여전히 ‘임신 중 금기’ 또는 ‘임신부 투여 시 주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런 표현은 법적 기준이 되므로 의료진은 처방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태아에게 문제가 생기면 법적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로서도 약 설명서에 ‘금기’나 ‘주의’라고 적혀 있으면 실제 위험 정도와 관계없이 큰 불안을 느낀다. 그 결과 약 복용을 거부하거나 중단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오히려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저출산이 국가적 문제로 거론되는 시대다. 그렇다면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의료 환경은 더욱 안전해야 한다.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임신부가 필요한 기본 약을 제때 제공받지 못한다면 정책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의약품 접근성은 한 나라 의료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우리는 첨단 의료기술과 정밀 의료를 이야기하지만 임신부 고혈압 치료에 필요한 기본적인 약조차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안전한 출산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다. 사회와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임신부가 자신의 건강 상태에 맞는 약을 불안 없이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의 기본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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