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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를 잃는 순간 시장을 잃는다

이보형 마콜컨설팅그룹 사장

입력2026-03-03 14:16

수정2026-03-04 11:24

이보형

이보형

마콜컨설팅그룹 사장

위기 관리에서 서사의 중요성을 묘사한 AI 이미지.
위기 관리에서 서사의 중요성을 묘사한 AI 이미지.

지난 10년간 글로벌 경영의 화두는 단연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와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였다. 기업은 가치를 말했고, 사회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가치가 곧 시장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2023년 미국 맥주 시장을 뒤흔든 ‘버드 라이트 사태’는 그 사실을 냉정하게 증명했다. 전략 없이 트렌드만 좇은 서사는 자산이 아니라 폭탄이 됐다.

2023년 버드 라이트는 트랜스젠더 인플루언서와의 협업을 통해 DEI라는 진보적 메시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브랜드의 핵심 고객층인 보수적 중년 남성들에게 ‘전통 가치에 대한 배신’으로 읽혔다. 새로운 고객층을 창출할 것이라는 회사의 의도와 정반대로 해석된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의 대응이었다. 당황한 회사는 ‘우리는 모두를 존중한다’는 모호한 중립 입장으로 선회했으나 결과는 오히려 처참했다. 보수 진영에는 비겁한 변명으로, 진보 진영에는 비겁한 후퇴로 비치며 양측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결국 20년 넘게 지켜온 미국 판매 1위 자리를 내주었고 1년 후 3위로 내려앉았다.

반면 2018년 나이키의 ‘콜린 캐퍼닉’ 캠페인은 정반대의 사례다.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무릎 꿇기 시위를 주도한 미식축구 스타 캐퍼닉을 광고 모델로 세웠을 때, 분노한 보수층은 나이키 운동화를 불태우는 영상을 SNS에 올리며 격렬한 불매 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이키는 사과 대신 ‘모든 것을 희생할지라도 무언가를 믿으라’는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 결과 일부 고객은 떠났지만 핵심 고객은 결집했다.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온라인 판매는 급증했다. 버드라이트는 핵심 고객을 잃었고, 나이키는 핵심 고객을 선택했다.

두 사례는 마케팅이 기업 브랜드 정체성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분열된 공론의 장에서 확고한 서사 유지가 마케팅의 성패를 가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략적 서사는 기업의 스토리를 트렌드와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정체성을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구조다. 사실은 하나지만, 그것을 어떤 이야기 속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전략적 서사 이론에선 현실이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서사 구조를 통해 ‘전략적 문제’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정책 환경은 사실의 집합이 아닌 지배적 서사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즉 기업이 처한 비시장적 위기나 기회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 사실을 어떤 맥락의 서사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2022년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카카오 서비스 중단 사태는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불길은 몇 시간 만에 잡혔지만, 디지털 공간에서 번진 불길은 훨씬 오래갔다. 카카오 서비스가 멈춘 뒤 다섯 시간이 넘는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플랫폼 독점의 오만’이라는 프레임이 빠르게 굳어졌다. 기술적 사고(事故)는 곧 소비자 불편을 넘어 정부에 의해 ‘사실상 국가 기간통신망’의 마비로 규정되었고, 여론은 이를 ‘플랫폼 권력의 위험성’이라는 공론의 화두로 끌어올렸다. 곧이어 이 이슈는 국정감사와 규제 논의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부분은 서사가 작동하는 환경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과거의 의제설정 이론들은 의제의 ‘형성-투사-수용’이라는 선형 구조를 전제했다. 그러나 지금은 온라인 플랫폼 서비스 알고리즘이 가시성을 결정하고, 익명 커뮤니티가 반(反)서사를 생산하며, 이것이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증폭된다. 영상 하나, 게시글 하나가 기업의 공식 입장을 압도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그 서사에 참여한다. 이러다 보니 이제는 기업이 이슈에 대응하는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

먼저 기업을 둘러싼 서사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살펴야 한다. 2018년 페이스북 캠브리지 애널리티카 사태 이후, 글로벌 공론장에는 ‘빅테크는 민주주의와 프라이버시를 위협한다’는 강력한 담론이 자리 잡았다. 이는 페이스북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술 산업 전체를 향한 거대 담론이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흐름이 자사로 번질 수 있음을 일찌감치 읽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은 ‘우리는 다르다’는 해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먼저 ‘디지털 제네바 협약’을 제안하고, 대학·NGO와 함께 AI 윤리 가이드라인을 공동 설계했다. 기업의 메시지를 대신 전달해줄 동맹을 먼저 구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위험한 빅테크기업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규범의 공동 설계자 자리에 앉았다. 학계와 국제기구의 언어를 빌려 ‘규칙을 만들고 따르려는 기업’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단순하다. 거대 서사가 만들어지면 기업의 해명만으로 막을 수 없다. 시장은 기업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위기가 닥치기 전, 자신을 둘러싼 서사 생태계를 읽고 공론장의 언어를 함께 설계할 동맹을 먼저 만드는 것이다.

둘째, 정보의 공백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카카오 사태의 진정한 교훈은 기술 복구가 아니라 서사 복구의 중요성에 있다. 카카오가 침묵하며 비워둔 공론의 공간을 채운 것은 ‘플랫폼 권력의 오만’이라는 외부의 서사였다. 기업이 침묵하는 몇 시간은 디지털 공간에서 몇 달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완전한 정보를 기다리다가는 해석의 주도권을 영영 놓치게 된다. 위기 초기 대중과 이해관계자가 입장을 정하는 동안은 기술 복구만큼 서사 복구가 중요하다. 파악된 사실과 확인 중인 내용, 다음 발표 시점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정보의 양보다 ‘계속 소통하고 있다’는 신호가 신뢰를 만든다.

셋째, 서사는 행동 위에서만 성립한다. 1982년 존슨앤존슨의 타이레놀 독극물 사건을 보라. 회사는 원인이 규명되기도 전에 전국에 유통된 제품 전량을 회수했다. 1억 달러가 넘는 손실을 감수한 이 결단이 있었기에, ‘소비자를 지키는 기업’이라는 서사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타이레놀은 1년 만에 점유율을 회복했다. 반면 2015년 폭스바겐은 배기가스 조작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기술적 해명 뒤에 숨었다. 행동이 없었기에 어떤 말도 서사가 되지 못했고, 결과는 시가총액 급락과 신뢰의 붕괴였다. 행동 없는 메시지는 공허하고, 메시지 없는 행동은 해석되지 않는다.

기업은 사건 자체의 복구를 넘어서서 서사를 재배치해야 한다. 사실은 하나지만, 서사는 여러 개다. 그리고 그중 어느 서사가 지배적이 되느냐에 따라 규제와 성과, 평판 흐름이 달라진다.

결론적으로 서사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방치해서도 안 된다. 서사의 생태계를 읽고, 동맹을 설계하고, 공백을 메우며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위기 관리의 무대는 이제 브리핑룸을 넘어 서사 생태계 전체로 확장되었다. 기업이 말하지 않는 순간에도 이야기는 계속 쓰이고 있다.

이보형의 퍼블릭 어페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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