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위기대응의 ‘태도’ ?
최승호 와이즈파트너즈 대표
입력2026-03-03 15:13
수정2026-03-03 15:16
최승호
와이즈파트너즈 대표
지난해 11월 29일 쿠팡이 3367만여 건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실을 공개했다. 성인 국민 대다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민관합동조사단 조사 결과 해킹은 작년 4월부터 11월까지 최장 7개월간 이어졌다. 쿠팡이 이를 인지한 것은 11월 18일이었다.
사태가 공개된 그날, 실질적 최고 책임자인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의 개인 명의 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후 며칠간도 마찬가지였다. 쿠팡은 홈페이지에 법인 명의 사과문을 게재했다. 사흘 뒤 해당 위치에 마케팅 배너가 걸렸다는 보도가 이어졌고,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사과문 재게시를 요구했다.
작년 12월 2일 국회 긴급현안질의에는 대리인이 출석했다. 의원들이 김 의장의 직접 사과 의향을 묻자, 대리인은 “한국 법인에서 벌어진 일이고 제 책임하에 있기 때문에 제가 사과드린다”고 답했다. 경계선은 분명했다.
김 의장은 보름 뒤 열린 국회 청문회에 불출석 사유서를 보냈다. “전 세계 170여 개국에서 영업하는 글로벌 기업의 CEO로서 공식적인 비즈니스 일정이 있어 부득이하게 출석이 불가하다.” 12월 30일과 31일 연석청문회에도 같은 방식으로 응했다. 국회 과방위는 김 의장 등 7인을 국회증언감정법 위반으로 고발 의결했다. 개인 명의 서면 사과문이 나온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처음으로 육성 사과가 나온 것은 2026년 2월 말 실적 컨퍼런스콜 자리였다. 사태 공개 후 약 석 달이 지나 있었다.
2024년 7월, 티몬과 위메프에서 판매대금 미정산 사태가 터졌다. 정부·금융감독원 집계 기준으로 피해업체 약 4만 8000여 곳, 미정산액 약 1조 3000억 원 규모였다. 소비자와 판매자들이 본사 앞으로 몰려들었다. 위메프 대표는 직접 현장을 찾아 항의하는 판매자들을 응대했다. 큐텐그룹 구영배 대표는 초기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 선 것은 7월 30일 국회 정무위원회 긴급현안질의 자리였다. 사태가 불거진 뒤 처음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가진 모든 것을 내놓겠다”고도 했다. 피해 금액이 얼마냐는 질문에는 “정확하게는 잘 모른다”고 답했다. 금융감독원장은 이 같은 태도를 두고 ‘양치기 소년’에 비유하는 취지로 강하게 비판했다. 위메프는 2025년 11월 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두 사건은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최고 책임자가 위기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있었다는 것이다. 멀리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태도의 거리다.
위기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대응 속도는 단순한 기술적 변수가 아니다. 조직이 피해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도덕적 신호다. 위기 커뮤니케이션 학자 티모시 쿰스는 위기 대응 전략의 핵심 세 축을 부인(Deny), 축소(Diminish), 재건(Rebuild)으로 분류했다. 쿠팡은 초기에 ‘유출’이라는 단어 대신 ‘노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부인과 축소 사이 어딘가였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공식 의결로 이를 ‘유출’로 정정해 재통지하도록 요구했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완벽한 해명이 아니다.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알고 있다’는 신호다. 그 신호가 늦어질수록 피해자는 다른 결론을 내린다. 불신은 그렇게 굳는다. 굳은 불신은 어떤 사과로도 녹지 않는다.
위기대응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최고 책임자가 직접 나서라. 대리인의 사과는 책임의 무게를 절반으로 줄인다. 때로는 오히려 책임 회피의 증거가 된다. 둘째, 먼저 인정하고 나중에 설명하라. 사실이 드러나기 전에 먼저 말하는 것과, 드러난 뒤에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메시지다. 셋째, 피해자의 언어로 말하라. 법률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사과문은 법정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여론의 법정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결국 피해자 쪽인가. 아니면 반대 방향인가. 그 방향이 곧 그 사람의, 그 조직의 본질이다. 기업은 상품을 팔기 이전에 신뢰를 판다. 신뢰는 평소에 쌓고, 위기에 소비한다. 그러나 태도가 무너지면 쌓아둔 신뢰도 하루아침에 증발한다. 쿠팡은 사태 공개 이후 불과 닷새 만에 일간 활성 이용자가 약 200만 명 이상 줄었다. 숫자는 냉정하다.
위기는 역량을 시험하지 않는다. 태도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한번 드러난 태도는 오래도록 기억된다.
최승호
·전 플레시먼힐러드 대표, 전 도모브로더 대표
·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우주경제로드맵TF 자문위원, 전 문화체육관광부 정부정책소통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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