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저주와 축복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글로벌매크로팀장
입력2026-03-10 18:10
지면 21면
한창 뜨거웠던 인공지능(AI) 혁신 기대가 위협으로 돌변했다. 지난해 10~11월 이후 미국 빅테크 주가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시장 흐름도 달라졌다. 그동안 비싸게 거래되던 테크 업종과 미국 증시의 밸류에이션이 낮아지는 반면 원자재와 전통 산업, 비(非)미국 자산은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AI가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면서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산업들이 피난처로 부각된 것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전통 산업 비중이 높은 국가들의 증시도 주목받는 중이다. 특히 저평가돼 있던 한국과 브라질 등의 주식시장이 양호한 성과를 내고 있다. 빅테크 기업 쏠림 현상도 완화되는 분위기다. 매그니피센트7(M7) 기업들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시가총액 비중은 지난해 11월 37.1%에서 올해 2월 33.8%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M7 기업들의 주가수익비율(PER)도 33배에서 26.4배로 하락했다. 그동안 시장에서 소외됐던 패자들의 세상이 온 것이다.
코스피가 6000선을 돌파한 데에는 해외 요인뿐 아니라 국내 제도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상법 개정을 비롯한 정책 변화로 자금 이동이 빨라졌기 때문이다. 실제 올해 1~2월 두 달 동안 은행에서 약 34조 원의 자금이 빠져나갔고, 주식형 펀드로의 유입은 크게 늘었다. 지난해 한 해 동안 주식형 펀드로 82조 8000억 원이 들어왔는데 올해는 두 달 만에 46조 7000억 원이 유입됐다.
반도체 실적 기대 역시 국내 증시 상승의 핵심 요인이다. 지난해 엔비디아의 영업이익은 190조 원, 마이크로소프트 206조 원, 애플 204조 원을 기록했다. 알파벳은 196조 원, 메타 120조 원, 아마존 115조 원 수준이다. 올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회사의 영업이익 합계가 300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글로벌 빅테크와 맞먹는 수준의 실적 기대가 반도체 주가 상승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이런 흐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빅테크 투자 확대가 지속될수록 재원 부담이 커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알파벳·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메타 등 4대 빅테크의 투자 증가율은 지난해 67%였고 올해도 설비투자를 75% 늘리겠다고 예고했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이들 기업의 투자 규모는 이미 영업이익의 95%, 영업현금흐름의 65%에 달했다. 일부 기업들은 반도체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증시가 부진한 상황에서 한국 증시만 강세를 보이는 흐름이 1년 이상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정부의 정책 변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TSMC에 미국 내 투자를 압박했던 것처럼 한국 반도체 기업의 실적이 좋아질수록 미국 내 투자 확대 요구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 코스피 6000 시대는 분명 반가운 변화다. 그러나 시장의 탐욕과 버블은 외부 충격과 함께 언제든 꺼질 수 있다. 상승장의 기대 속에서도 시장을 흔들 수 있는 변수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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