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원전은 실수였다”…EU의 뼈아픈 고백
“이란 전쟁에 산업 경쟁력 타격”
佛·獨 등 에너지 자립 한목소리
마크롱 “원자력은 에너지 주권 핵심”
EU, SMR 개발에 2억유로 지원
입력2026-03-11 17:55
수정2026-03-11 17:59
지면 1면
“1990년 유럽 전력 생산의 3분의 1은 원자력이 차지했지만 지금은 15%에 못 미칩니다. 안정적이고 저렴한 저탄소 발전원에서 등을 돌린 것은 전략적 실수였습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사진)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10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민간원자력 정상회의에서 약 10분에 걸쳐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중동 위기는 유럽의 구조적인 에너지 의존을 가리키는 독촉장”이라면서 “독립적·안정적이면서 경쟁력 있는 에너지를 위해서는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모두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자립과 관련한 유럽의 위기는 심각하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원유 수입이 끊긴 데 이어 이번 이란 전쟁에서 중동산 원유 수입에 타격을 받자 안정적 발전원의 필요성이 한층 절실해진 모습이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유럽의 비싼 전기요금은 소비자물가뿐 아니라 산업 경쟁력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면서 “인공지능(AI), 로봇 등 차세대 산업 혁명은 저렴하고도 풍부한 전기에 달렸다”고 단언했다. 원전 강국인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미 탈원전의 길을 걷고 있는 독일까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견해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유럽 내 탈원전 대표 주자로 꼽혀온 독일마저 ‘탈원전 자성’에 가세한 점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회의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날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개인적으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과 같은 의견”이라고 토로했다.
독일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 시절인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탈원전을 선언했다. 한때 37기에 달했던 원전으로 전체 전력의 3분의 1까지 생산했다. 그러나 탈원전 후 점차 원자력발전 비중을 줄여 마지막 원전 3기마저 2023년 4월 가동을 중단했다.
탈원전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던 메르츠 총리는 “탈원전 결정이 후회스럽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미 수년째 해체 작업을 진행 중인 원전을 재가동하려면 신규 건설에 버금가는 복구 작업이 필요한 탓이다. 독일은 탈원전과 함께 재생에너지 비중을 대폭 늘렸지만 날씨에 따라 발전량의 변동성이 높아 최근 가스발전소 신설을 추진 중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원전 재부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최초 탈원전 국가로 꼽히는 이탈리아는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탈원전 결정을 뒤집고 내년까지 원자력발전 재개를 법적·기술적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벨기에도 지난해 의회 의결로 탈원전 폐기를 공식화했다. 스웨덴은 원전 증설을, 폴란드는 신규 건설을 추진 중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함께 이번 정상회의를 공동 주최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원자력의 가치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화석연료는 지정학적 상황에 따라 압박의 수단, 혼란을 야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며 중동 사태를 빗댔다. 그러면서 “원자력은 에너지 주권과 탈탄소, 일자리 창출을 동시에 책임지는 핵심”이라면서 “전 세계에서 가동되고 있는 원전을 계속 운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프랑스는 전력의 70%를 원자력으로 생산하는 원전 강국으로 꼽힌다.
유럽에서는 미국·중국의 원자력 부흥에 대한 경계감도 상당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각국의 원자력발전 투자에 더해 유럽 차원의 대규모 프로젝트가 필요한 이유로 “미국·캐나다·중국은 혁신의 최전선에 서서 속도를 내고 있다”고 지적하며 “유럽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또 우라늄 공급망 다각화, 한국·일본 등 방사성폐기물 처분 기술이 뛰어난 국가와의 협력도 필요한 과제라고 덧붙였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 역시 “원자력 레이스는 이미 시작됐고 유럽이 주도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미국·중국보다 많은 전문인력을 보유하고 더 빠르고 큰 규모로 움직여 차세대 원자력의 리더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마크롱 대통령의 제안에 화답하듯 소형모듈원전(SMR) 개발을 위한 2억 유로(약 3400억 원) 규모의 보증 프로그램을 가동해 관련 기술 개발을 지원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자금은 탄소배출권 거래 수익에서 조달할 예정이다.
민간원자력 정상회의는 원자력 부활을 취지로 2024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처음 개최됐다. 당시 참가국은 34개국이었지만 올해는 38개국으로 늘었다. 이번 회의에서 우리나라 대표로 연단에 오른 임갑수 한미원자력협력 정부대표는 한국 정부의 대형 원전 2기 및 SMR 1기 건설 추진 계획, 원전 설계·제조·건설·운영에 이르는 전 주기 공급망 강화 등을 설명했다. 또 핵확산금지조약(NPT) 당사국으로서 비확산과 안전 조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원칙을 확고히 준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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