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장만 주문 받아도 횡재”…불꺼지는 봉제골목
■‘알테쉬’ 침투…10곳 중 6곳 매출 뚝
해외 저가의류·경기불황 겹쳐
국내 의류 제조업 매출 직격탄
창신동 등 봉제골목 공장 줄폐업
“디지털 전환·청년층 유입 절실”
입력2026-03-11 18:47
수정2026-03-12 07:31
지면 25면
“남성복이 잘 안 팔려서 숙녀복으로 바꿨는데 그래도 일감이 없네요.”
이달 10일 찾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한 봉제 공장. 20평(66㎡) 남짓한 공간에서 남편과 18년째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최경숙(53) 씨가 완성된 검정 코트를 다림질했다. 처음에는 남성복을 만들었지만 2년 전부터는 여성 외투 위주로 품목을 바꿨다. 한때 20곳이 넘던 납품처는 최근 3곳까지 줄었다. 최 씨는 “2010년 무렵부터 봉제업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면서 “주변 가게에서는 하루 10장만 주문이 들어와도 ‘횡재’라고 표현할 정도”라며 한숨을 쉬었다.
1960년대부터 서울 종로구와 동대문구·중구 일대에는 봉제 공장이 모여들었다. 섬유산업 호황기에는 봉제 골목마다 ‘드르륵’ 하는 재봉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찾은 종로구 봉제 골목에는 ‘임대’라고 써 붙인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통상 3월처럼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는 의류 판매가 늘어 업계가 활기를 띠지만 골목에는 원단을 실어 나르는 몇몇 차량을 제외하면 인적조차 드물었다.
해외 저가 의류 유입과 경기 불황이 맞물리면서 K패션의 뿌리인 봉제 산업이 휘청이고 있다. 신기술 도입과 청년층 유입 확대 등을 통해 산업구조를 변화시키고 소규모 봉제 기업 스스로도 새로운 먹거리를 마련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산업통상부의 ‘2025년 의류 제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매출이 전년 대비 증가했다고 답한 의류 제조 업체는 전체의 4.8%에 불과했다. 반면 매출이 감소한 곳은 62.9%에 달했다. 2025년 매출 증가를 예상한 업체 역시 2.6%에 그쳤다. 매출이 줄어들자 봉제 산업 규모 역시 점차 축소되고 있다. 통계청의 전국 사업체 조사 결과 의복·가방·신발 제조 업체 수는 2020년 3만 9491개에서 2024년 3만 1975개로 약 19% 줄었다.
숙련 기술자들도 적은 일감과 낮은 임금을 버티지 못한 채 봉제 골목을 떠나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공장들은 ‘객공’을 구하지 못해 물량을 하청 공장으로 넘기는 상황이다. 40년 경력의 봉제사 이연자(77) 씨는 “하루에 5만 원 벌면 많이 버는 것”이라며 “예전에는 야근을 밥 먹듯 했는데 주문이 없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6월 중구 신당동의 한 봉제 공장에서는 임금체불 문제로 직원과 갈등을 빚던 사장이 방화를 저지르는 사건도 있었다.
봉제업 침체의 주요 원인으로는 중국산 저가 의류 수입이 꼽힌다. 통계청에 따르면 의복 제품 수입액은 2020년 97억 3257만 달러에서 지난해 129억 7938만 달러로 급증했다. ‘알테쉬(알리·테무·쉬인)’ 등 중국의 저가 e커머스를 통해 들어오는 값싼 의류에 국내 봉제업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여기에 고물가와 경기 불황의 영향으로 소비자들의 지갑까지 닫히자 봉제 산업의 위기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에 각 지방자치단체는 봉제 인턴십 운영과 제조 공정 디지털화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봉제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현재 노동집약적산업 구조를 탈피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추호정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는 “인력에 의존해온 기존 생산 방식에서 벗어나 첨단기술을 활용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최근 유럽에서 ‘에코 디자인’이 각광받는 것처럼 정부가 새로운 의류 시장을 적극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려면 결국 K패션 트렌드를 주도할 수 있는 청년층의 유입이 필수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를 위해 적정 임금 단가를 설정하고 공장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젊은 디자이너와 지역 봉제 업체를 연결하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방안 또한 제시된다. 정욱환 한성대 글로벌패션산업학부 교수는 “노동집약적 생산구조의 중국·베트남과는 가격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운 만큼 역투자를 통해 ‘K패션’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고 해외시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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