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람’보다 ‘좋은 정책’ 찾아야
최형욱 논설위원
힘들수록 ‘남 탓’하고 기존 제도 불신
책임 전가 땐 부동산 등 해결 어려워
‘어떤 정책 필요한가’로 질문 바꿔야
그래야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
입력2026-03-26 06:00
수정2026-03-26 06:00
지면 34면
최형욱
논설위원
인지심리학자인 조지 A 밀러의 1956년 논문에 따르면 인간은 한 번에 평균 7개(5~9개) 정도의 정보 덩어리만 기억하고 조작할 수 있다. 또 정보 단위를 단순 나열하는 것보다 그룹화하는 것이 더 외우기 쉽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이런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음모론과 연결해 분석하기도 한다. 현실이 복잡할수록 존재하지도 않는 패턴과 연결 고리를 만들고 음모론이 제공하는 ‘단순한 답’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현실이 고통스러운데 그 해법을 내놓기 어려울 때 음모론은 종종 마녀사냥으로 돌변한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는 “후방의 배신자들이 최전선 군인들의 등에 비수를 꽂는 바람에 전쟁에서 졌다”는 소문이 횡행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패전과 경제 파탄의 원인을 유대인·공산주의자 탓으로 돌려 집권에 성공했다. 때로는 정치적 목적 아래 음모 서사가 강화되기도 한다. 예컨대 세월호 고의 침몰설, 부정선거론, 이재명 대통령 공소 취소 거래설 등이 대표적이다.
음모론은 ‘보이지 않는 세력’이 세상을 조종하고 망친다는 논리다. 기존 사회 시스템과 전문가들을 불신하고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단순화한다. 또 사회적 불안감과 개인의 무력감을 반영한다. 이 때문에 음모론은 ‘영웅적 지도자’에 대한 갈망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흔하다. 사람들은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혼란할수록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고단한 현실이 한 사람의 비전과 결단에 힘입어 단숨에 해소되길 바라는 것이다. 과거 친문(친문재인) 인사들은 이런 국민들의 정서에 편승해 문재인 대통령을 이순신 장군, 달님 등에 비유하기도 했다.
영웅적 리더에 대한 사회적 욕구는 포퓰리즘 출현을 동반하기도 한다.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해 국민 삶을 개선하려면 연금·노동·교육 등 구조 개혁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으로 이해관계자들의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 결국 구원자로 등판한 지도자는 즉각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입맛에 맞춰 현금 뿌리기 등 대증요법을 내놓기 마련이다.
‘이재명은 합니다’를 내세워 집권한 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고공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실질적 성과와 소통을 중시하는 국정 스타일 덕분이라는 분석이 많다. 문제는 정책 결정 과정이 제도와 시스템이 아닌 대통령 개인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하는 대통령’ 개인만 부각되면 국가적 난제 해결을 위한 제도적 역량과 사회적 신뢰 자본이 약화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세세한 것까지 지시하는 만기친람형 리더십은 행정부의 자율성을 떨어뜨려 정부 조직의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 또 국민과 직접 소통한다는 장점에도 지지층 결집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진영 갈등을 키울 수 있다. 여당은 비상시국을 내세워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이를 비판하는 야당·사법부·언론 등을 적폐 세력으로 취급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아파트값 상승, 물가 상승 등 구조적 문제를 특정 집단의 잘못 탓으로 단순화하려는 듯해 우려스럽다. 사실 공급 확대, 유통 구조 혁신 등 근본 대책은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일부 국민과 기업에 책임을 전가한다고 이들 문제가 해결될지 의문이다. 가령 다주택자들에 대한 규제 강화로 인해 아파트 매물이 늘었지만 전세난이 가중되는 등 무주택 서민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검찰 해체 작업은 ‘검찰 악마화’에만 매달리다 범죄 대응 역량 강화와 피해자 보호라는 최우선 가치는 뒷전으로 밀린 모양새다.
사회적 난제 해결은 단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숱한 고민과 숙의, 국민 간의 갈등 해소 등을 동반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윤석열 정부의 의료 개혁 실패에서 보듯 정교한 정책 설계는 뒤로 미룬 채 기득권 책임으로만 돌린다면 원래 목표 달성은 요원해지게 된다. 또 대통령 말이 거칠어질수록 구호가 정책을 대신하고 공직자들은 누군가를 손봐주는 데 열을 올리게 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오직 국민의 삶’을 국정 운영 원칙으로 삼아 탈이념·탈진영·탈정쟁의 실용주의로 나아가자고도 했다. 그렇다면 ‘누가 나쁜가’가 아니라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로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이 대통령도 국정 목표를 달성하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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