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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쇠퇴 알린 ‘수에즈 모먼트’...미국도 오나[이태규 특파원의 워싱턴 인사이드]

1956년 이집트 수에즈 국유화 선언에

英·佛 연합 침공...美·러 압박에 치욕적 정전

유럽 지고 美·러의 냉전시대 알린 신호탄

군사·경제서 약점 노출 美 ‘피크 아메리카’ 시작일 수도

韓, 유연한 태도로 종합 판단, 피해 최소화해야

입력2026-03-29 11:10

지면 30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7일(현지 시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도착해 에어포스원에서 내려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7일(현지 시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도착해 에어포스원에서 내려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1956년 10월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침공한다. 그해 7월 이집트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핵심 해상로인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운하를 운영해온 영국과 프랑스가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1952년 혁명으로 집권한 가멜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반이스라엘 노선에 불안감을 느낀 이스라엘 역시 힘을 합쳤다.

전쟁 초기에는 이들 3개국이 이집트를 압도했다. 개시 일주일도 안 돼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점령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수에즈 운하 북부 지역을 점거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동맹임에도 사전 통보도 없이 전쟁을 개시한 3개국에 격분한 미국은 영국 파운드화 폭락을 방관했고, 국제통화기금(IMF)로 하여금 영국에 대한 지원을 하지 못하게 해 영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했다. 소련은 영국, 프랑스에 핵미사일을 쏠 수 있다는 초강수를 두며 양국을 코너로 몰았다. 결국 이들 3개국은 굴욕만 안고 수에즈운하 점유권을 이집트에 넘긴 채 철수를 하고 만다.

수에즈 전쟁은 1956년 10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단 열흘도 지속되지 않았지만 국제질서를 바꾼 중대한 변곡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상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지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는 냉혹한 현실만 절감한 채 치욕적인 정전을 받아들여야 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순간을 ‘수에즈 모먼트’라고 이름 붙이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2개의 초강대국 간 냉전의 시대가 막이 올랐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정확히 70년 만에 미국이 이란 공격으로 ‘미국판 수에즈 모먼트’에 직면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런던정경대(LSE) 파와즈 게르게스 국제관계학 교수는 최근 폴리티코 인터뷰에서 “한 시대가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근본적인 순간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미국은 전쟁에서 발을 뺄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상군을 투입할 수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질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 이번 전쟁으로 미국의 여러 약점도 노출됐다. 미국은 이란 내 1만 개가 넘는 목표물을 정밀 타격하며 첨단 무기의 위력을 뽐냈지만 드론 등 비대칭 전력 대응태세에 취약점을 드러냈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유조선을 호위할 수 있는 충분한 해군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도 노출했고, 미사일이 빠르게 소진해 이를 채우려면 수년이 필요하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경제 측면을 보면 이란이 위안화로 원유 대금을 결제한 선박만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할 수 있게 해 미국의 패권을 지탱해온 ‘페트로 달러’에 금이 갈 조짐이다. 당장 원유 수급이 급한 나라들은 위안화를 찾을 수밖에 없고 이는 국제 결제 시장에서 위안화 사용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미국 경제의 중장기 아킬레스건인 막대한 재정 적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비단 이번 전쟁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미국이 내리막길을 걷는 ‘피크 아메리카’ 징후도 여러 곳에서 포착됐다. 2025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피터 하윗 미 브라운대 명예교수는 서울경제 신년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과학연구 예산을 삭감하고 과학 인재에 대한 압박도 강화하고 있다”며 “다음 정권에서도 이런 정책을 고수하면 미국에 큰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압박에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들도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며 ‘미국 없는 세상’을 대비하고 있다.

물론 전쟁의 결과는 예단할 수 없지만 어느 쪽으로든 국제 정치·경제에 중대한 파급효과를 미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럴 때일 수록 우리 정부는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유연한 태도로 종합적으로 판단, 피해를 최소화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태규 특파원의 워싱턴 인사이드
이태규 특파원의 워싱턴 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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