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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나라, 위험한 사회

■유충현 법무법인 지평 안전경영컨설팅센터장

중대재해법 처벌 강화만이 능사 아냐

법과 간극 메울 ‘예방의 구조화’ 필요

입력2026-03-29 17:43

지면 23면
유충현 법무법인 지평 안전경영컨설팅센터장. 사진제공=지평
유충현 법무법인 지평 안전경영컨설팅센터장. 사진제공=지평

40여 년 전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산업 문명이 스스로 만들어낸 ‘제조된 위험’을 경고했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위험은 비가시화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는 그의 통찰은 급속한 산업 발전과 기술 혁신을 경험하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국내 안전 제도는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을 상회할 만큼 촘촘하다. 법과 제도만 보면 분명 ‘안전한 나라’에 가깝다. 그러나 법령 정비가 사고 감소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규범의 완성도와 현장의 높은 사고율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역설이 우리가 마주한 ‘안전한 나라, 위험한 사회’의 현실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의무 위반→재해 발생→인과관계 입증’ 구조로 경영 책임을 엄중히 묻는다. 기업이 형식적인 의무 이행이나 사고 이후의 법적 방어에만 집중한다면, 기술적ㆍ공학적 예방의 공백은 메워지지 않는다.

해외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 텍사스 화학공장 가스 누출 사고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기업이 기술적으로 가능한 안전조치를 사전에 이행했다는 점이 인정돼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다. 영국의 분진 폭발 사고에서도 외부 전문기관의 기술 검증과 객관적인 안전관리 기록이 법적 판단에 중요한 근거가 됐다. 사고 이후의 변론보다 사고 이전의 예방 수준이 법적 결과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영국 산업안전 규범의 핵심인 ‘ALARP(As Low As Reasonably Practicable)’ 원칙에서도 확인된다. 합리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기술적 조치를 다했는지가 책임 판단의 핵심 기준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산업 현장의 위험은 디지털 전환과 탄소중립이라는 구조 변화 속에서 더욱 복합화되고 있다. 새로운 설비와 에너지 시스템은 생산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을 동반한다. 노란봉투법 시행 등 노사 관계 환경의 변화까지 더해지면서 공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전 안전 조치는 갈등을 예방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안전은 더 이상 비용이 아니라 기업가치를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자 ESG 경영의 핵심 요소다.

결국 해법은 내부 안전관리체계의 실질적 작동과 외부의 객관적 검증을 결합한 ‘예방의 구조화’에 있다. 처벌의 강도만으로는 사고를 줄일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그 법의 간극을 메울 사전 예방의 실효성이다. 과학적 관리와 공학적 예방, 그리고 내ㆍ외부의 철저한 검증이 함께 작동할 때 우리는 ‘위험한 사회’를 넘어 지속 가능한 ‘안전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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