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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지 대란, ‘쓰봉’ 사재기

입력2026-03-31 16:49

지면 31면
신경립

신경립

논설위원

발단은 한 슈퍼마켓의 화장지 판촉 행사였다. 1973년 10월 31일 일본 오사카 센리뉴타운의 다이마루피코크에는 특가 판매 전단지를 보고 온 200명 이상의 주부들이 개점과 동시에 몰려들었다. 화장지 1400개가 1시간 만에 동난 일은 다음 날 지역 조간신문에 ‘종이 광시곡’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됐다. 10여 일 전 당시 통상산업장관이 오일 쇼크 극복을 위한 ‘종이 절약’을 호소한 뒤로 꿈틀대던 사람들의 불안 심리에 제대로 불이 붙었다. ‘화장지 생산이 어려워진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고 전국에서 화장지가 동나기 시작했다. 불똥은 엉뚱하게도 미국으로까지 튀었다. 유명 토크쇼 진행자 자니 카슨이 2000만 명의 시청자 앞에서 농담 조로 화장지 부족 사태를 언급하자 미국 소비자들도 사재기에 뛰어든 것이다. ‘화장지 대란’은 수개월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뜻밖의 외부 충격에 직면한 대중의 심리적 공포는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인 집단행동으로 나타나곤 한다. 일본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위기 때마다 화장지 대란에 시달린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도 그랬고 최근 이란 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화장지 사재기 현상이 벌어졌다.

한발 떨어져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소동도 ‘내 일’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에 따른 나프타 대란 때문에 종량제 쓰레기봉투 사재기가 한창이다. 서울시의 하루 ‘쓰봉’ 판매량이 5배로 치솟고 급격한 사재기가 일시적 품절로 이어지자 소비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시장 혼란이 커지자 정부는 ‘최악의 경우 일반 봉투 사용 허용’이라는 방침을 공표하며 사재기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온라인상에는 기저귀·세제·생수 등 ‘사재기 리스트’가 돌고 있다. 전쟁이 길어지면 또 어떤 ‘대란’이 불거질지 모른다. 안정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성숙한 시민 의식과 정부의 선제적인 생필품 수급 대책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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