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정치의 시대, 중견국 연대는 가능한가
이숙종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 특임교수
입력2026-04-06 05:00
수정2026-04-06 05:00
지면 29면
올해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연설이 가장 주목받았다. 그는 “서방이 주도해 온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이미 와해됐다”고 선언하며 “캐나다를 비롯한 중견국들이 연대해 새로운 대응 전략과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많은 이들이 공감했지만, 정작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답이 충분하지 않았다. 중견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힘의 위치와 국제사회에서의 행태로 정의된다. 위치적 측면에서 어디까지를 중견국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선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G7을 제외한 국가들을 지칭해 왔지만, 최근에는 미국·중국·러시아를 제외한 일부 G7 국가들까지 스스로를 중견국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행태의 측면에서 중견국은 국제법과 규칙을 존중하고 협력을 촉진하며 이해관계를 중재해 다자체제의 안정적 작동에 기여하는 국가로 이해된다.
중견국 외교의 환경은 지난 30여 년 사이 크게 변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질서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1990년대에는 캐나다·호주와 북유럽 국가들이 1세대 중견국으로 부상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과 인도네시아 등 비서구권 국가들이 2세대 중견국으로 등장했다. 이 시기까지 미국은 자유주의 질서 유지라는 공동 이해 속에서 중견국 외교의 확대를 지원해 왔다.
하지만, 2012년 시진핑 체제 출범 이후 중국의 부상이 본격화되고 2017년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미·중 경쟁이 군사·경제·기술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미·중 사이에 놓인 중견국의 전략적 공간은 좁아졌고, 중견국 외교 논의도 한동안 힘을 잃었다. 그러다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제법 경시, 관세 압박, 동맹국에 대한 외교적 공격이 이어지자 중견국 연대 논의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규칙 기반 질서를 흔드는 미국을 우회하거나 보완하기 위한 안전망을 모색하는 흐름이라는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자유진영의 중견국들이 규칙 기반 다자체제를 복원하려면 강대국에 대한 일정 수준의 전략적 자율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보와 경제 측면에서 대미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이러한 연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쉽지 않다. 최근 대서양 관계의 가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토 회원국들은 집단방위 체제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방위력 증강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집단방위 체제가 부재한 아시아에서는 상황이 더욱 어렵다. 미국과의 양자동맹에 의존해 온 한국과 일본에 대미 안보 자율성 논의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자산과 병력이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 중동으로 이동하는 현실은 아시아 동맹국들로 하여금 안보 자율성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최근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충돌로 촉발된 중동 위기는 자유진영 중견국 연대의 또 다른 시험대가 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후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와 나토 회원국 등 이른바 ‘22개국 그룹’은 공동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군함 파견 요청에 대해 나토는 집단방위 조항에 적용되지 않는다거나 일본은 평화헌법에 위배한다는 등의 이유로 사실상 거절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쓸모없는 동맹’이라는 비판에 비합리적인 협력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항행의 자유라는 국제 규범과 에너지 위기 확산 가능성을 고려하면 더 이상 방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확전인지 종전인지 미국과 이란의 입장이 엇갈리며 혼란이 커지는 가운데 중견국들은 위기 확산을 막고 종전 이후 수습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유엔의 중재 기능이 크게 위축된 오늘날 중견국의 책무는 한층 무거워지고 있다.
각국이 각자도생의 길로 향할수록 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중견국들은 강대국 정치에 대한 방어적 대응을 넘어 규칙기반 질서 회복을 위한 국제협력을 설득하고 주도하는 외교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특히 인도·브라질·멕시코 등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을 통해 강대국 정치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 각자는 약하지만, 연대할 때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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