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해법, 한국 감성과 정(情) [최승호의 위기 대응의 정석]
최승호 와이즈파트너즈 대표
입력2026-04-06 14:53
최승호
와이즈파트너즈 대표
한국에서 위기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관계의 문제다. 미국의 위기대응 교과서는 세 가지를 가르친다. 사실을 말하라. 빨리 말하라. 책임을 져라.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원칙만으로 위기를 수습한 기업은 드물다. 매뉴얼대로 했는데도 여론은 돌아서지 않았다. 사과문을 냈는데도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에는 ‘정(情)’이라는 정서가 있다. 정은 오랜 시간의 축적이다. 반복된 접촉, 함께한 기억, 건네진 배려 속에서 자란다. 계약서에 없는 것이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도, 회사와 직원 사이에도 정은 쌓인다. 그 정이 배신당할 때 터져 나오는 것이 ‘한(恨)’이다. 한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해소되지 못한 억울함이 응축된 에너지다. 한번 쌓인 한은 오래간다.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한국에서 위기가 증폭되는 이유는 사건의 크기 때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정을 저버린 태도 때문이다.
사고는 예고 없이 온다. 그때 리더가 어디에 있었는지가, 그 조직의 전부를 말한다. 2014년 2월 17일 밤, 코오롱 마우나오션리조트 강당 지붕이 무너졌다. 부산외국어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진행 중이었다. 10명이 숨졌다. 1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꿈을 펼치기도 전이었다.
코오롱그룹은 사고 이튿날 이른 새벽, 이웅열 회장이 현장 지휘소를 찾았다. 사죄문이 발표됐다. 첫 문장은 이것이었다. “엎드려 사죄 드립니다.” 이어 “특히 대학 생활을 앞둔 젊은이들이 꿈을 피우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하게 된 점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느끼며, 소중한 분들을 잃게 되어 비통함에 빠지신 모든 분들께 깊은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라고 했다. 국민께 심려를 끼친 데 대한 책임 통감, 사고대책본부 설치, 원인 규명 약속이 뒤따랐다. 화려한 수식이 없었다. 절차를 밟았고, 자리를 지켰고, 말해야 할 것을 말했다.
위기 수습의 최소 조건은 단순하다. 피해자의 한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유가족들의 분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가 현장에 나타났다. 피해자를 향한 언어로 말했다. 사고대책본부를 가동했다. 원인 규명을 약속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한이 쌓이는 순간은 대부분 그 당연한 것이 없었을 때다. 위기의 순간 그 자리를 지키는 기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반대의 경우는 한을 키운다. 2023년 3월, 한국타이어 대전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8만7천여 제곱미터가 전소됐다. 타이어 21만 개가 사라졌다. 수백 명의 직원이 한순간에 일터를 잃었다. 그러나 실질적 최고 책임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조현범 회장은 이미 구속 상태였다. 이수일 대표이사의 사과문은 사고 3일 후에야 나왔다. 직원들은 유급휴업으로 전환됐다. 고용 안정에 대한 약속은 불투명했다. 노조의 농성이 장기화됐다.
지역 주민을 위한 헬프데스크는 만들었다. 환경정화 작업도 했다. 형식은 갖췄다. 그러나 직원들은 느끼지 못했다. 우리를 향한 정을. 회사가 우리 편이라는 것을. 정이 전달되지 않으면 시스템은 공허하다. 한은 그 공허함 속에서 자란다.
위기 앞에서 정은 선택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생존의 조건이다. 서구의 위기관리는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한다. 그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피해자들이 묻는 첫 번째 질문은 법리가 아니다. “저 사람이 진심인가.” “우리를 사람으로 대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교한 사과문도 여론을 돌리지 못한다. 이것이 한국식 위기대응이 영미식과 다른 이유다. 한국에서 위기를 끝내는 것도 결국 정이다. 피해자의 한이 남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위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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