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시원한 기업 응징… 값비싼 통상 보복[기자의눈]
입력2026-04-06 18:14
지면 30면
취재 현장에서 정부와 국회가 기업을 세게 다루는 장면을 보면 내심 속이 시원하다. 의원들이 잘못을 저지른 기업을 불러 호통을 치고 정부는 전방위적인 조사·감사에 나선다. 결국 기업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머리 숙인다. 기업이 사고를 칠 때마다 정부와 국회가 기업인을 실컷 때리며 국민의 감정적 응어리를 풀어주는 광경은 어느새 공식처럼 굳어졌다.
지난해 말 미국 상장 기업인 쿠팡이 3000만 건이 넘는 우리 국민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사태를 두고도 정부와 국회는 같은 모습을 보였다. 국회는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청문회로 시작해 쿠팡 경영진을 증인석에 세웠고 곧바로 여러 상임위가 함께하는 연석 청문회로 판을 키웠다. 개인정보 유출에서 출발한 쟁점은 노동·물류·불공정거래·세무까지 한 번에 털겠다는 국정조사 요구로 확장됐다. 정부도 비슷했다. 개인정보 유출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국세청 세무조사, 공정위 조사, 노동 감독 등 여러 부처가 동시에 움직이며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문제는 이런 속풀이 방식을 글로벌 기업에 그대로 적용했을 때 감당해야 할 대가가 너무 비싸다는 점이다. 쿠팡의 미국 투자사들은 한국 정부가 개인정보 유출을 계기로 세무, 공정거래, 노동 규제까지 총동원해 차별적으로 압박했다며 미국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를 요청했다. 301조는 필요할 경우 특정 국가·산업을 겨냥해 고율 관세와 서비스 제한까지 허용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통상 보복 수단이다. 가뜩이나 관세 인상 명분을 찾는 데 혈안인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이 사건을 제대로 걸고 넘어질 경우 쿠팡을 향했던 분노가 순식간에 한국 전체 수출기업을 향한 청구서로 돌아올 수 있는 셈이다.
우리의 속풀이 방식이 글로벌 관행과 견줘 지나치게 감정적이지 않은지 되돌아볼 때다. 일례로 싱가포르는 비슷한 상황에서 행정력을 총동원해 기업을 전방위로 압박하는 대신 독립된 개인정보 감독 기구가 정해진 절차와 기한 안에서, 사건과 직접 관련된 사안만을 대상으로 과징금과 시정 명령을 내리는 방식을 고수한다. 처벌 강도는 세더라도 ‘어디까지가 규칙인지’ 기업과 투자자가 미리 알 수 있는 구조다. 이제 우리도 감정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냉정한 규제 시스템을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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