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헨렌스의 빅풋, 포모사 원주민 등…지워지고 소외된 기억을 불러내다
나현 개인전 ‘아무것도 아닐거야’
연희동 초이앤초이갤러리, 4월 19일까지
입력2026-04-08 17:50
지면 27면
지난 1980년 5월 18일 미국 워싱턴주 세인트헬렌스 화산이 폭발했다. 혼란 속에서 지역 전설 속 거인인 ‘빅풋(Bigfoot)’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 정부가 빅풋을 잡아 어디론가 끌고 갔다는 것이다. 같은 날 우리나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는 계엄군이 투입돼 폭력적인 진압을 벌였다.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됐는데 이 중에는 무연고자가 다수 포함됐다.
작가 나현(56)은 같은 날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을 연결해 작품 ‘빅풋을 찾아서’를 만들었다. 가로 560㎝, 세로 640㎝, 높이 390㎝의 대형 작품이다. 거인이 팔을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머리는 바닥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신발 하나가 벗겨져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작가는 “광주에서 시민들이 이렇게 끌려갔는데 아마 ‘빅풋’도 그랬을 것이라고 상상해서 만들었다. 역사 속 지워지고 소외된 기억들을 되살리려는 시도”라고 했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시간,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서사 속에서 가려져 있던 것들을 찾아내 탐구해 온 작가 나현의 개인전 ‘아무것도 아닐 거야’가 서울 연희동 초이앤초이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가 고집스럽게 끌고 온 ‘역사 해석’의 궤적을 따라가며 현실과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포모사 프로젝트’는 대만 원주민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다시 돌아본다. 현지 동물과 식물 기록을 중심으로 배치된 작품은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공동체의 규율과 기억이 축적된 구조로 제시한다.
‘바벨탑 프로젝트’의 일부인 ‘월넛 바벨 타워(Walnut Babel Tower)’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베를린 시내에서 나온 건물 잔해와 전쟁 폐기물로 만들어진 인공 언덕인 ‘악마의 산’과 서울 난지도를 교차시키며 파시즘 근대사와 언어, 이주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드러낸다.
또 영상 작업인 ‘아르볼(Arbol)’은 쿠바에 정착한 한인 이주민의 역사를 배경으로 사탕수수 노동과 퍼포먼스 드로잉을 결합해 ‘민족’ 개념의 복합성과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폐허로부터 다양성이 회복되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홍익대 회화과를 나왔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순수미술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과 하종현 미술상 등을 수상했다. 전시는 이달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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