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량제 봉투가 보여준 석유 의존의 민낯
양지혜 사회부 기자
입력2026-04-08 18:20
지면 30면
“종량제봉투를 80만 원어치 사재기한 사람이 있다던데 저도 미리 사둬야 할지 고민이에요.”
최근 지역 맘카페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핫토픽은 단연 ‘종량제봉투’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장기화한 여파가 일상 곳곳으로 번지면서, 특히 종량제봉투 수급이 불안정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퍼지자 곳곳에서 사재기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종량제봉투를 개인 간 재판매하는 것은 현행법상 불법이지만 아파트 커뮤니티 곳곳에서는 프리미엄을 붙여 몰래 되파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아파트 오픈채팅방에는 “종량제봉투 20ℓ 5개를 1만 원에 판다”는 글이 올라왔다가 “사재기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지자 곧바로 삭제됐다. 서울 기준 20ℓ 종량제봉투 가격이 490원인 점을 감안하면 혼란을 틈타 4배가 넘는 차익을 노린 셈이다.
490원짜리 봉투가 불러온 사회적 혼란의 배경에는 취약한 에너지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근 취재 과정에서 연락한 한 교수는 “종량제봉투 같은 비닐봉지는 물론 우유 용기의 코팅제, 배달에 쓰이는 일회용 식기까지 모두 석유화학 제품”이라며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그동안 이런 제품이 지나치게 무분별하게 사용돼 왔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30여 년 전에도 마트에서 물건을 사면 종이봉투에 담아주는 경우가 많았다”며 “한국처럼 에너지 낭비가 일상화된 나라를 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이번 종량제봉투 대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다. 서울 마포구는 8일 수요가 많은 10ℓ와 20ℓ 종량제봉투 중심으로 추가 제작을 요청했고 경기 파주시 역시 제조업체 두 곳을 추가 확보해 11일부터 하루 공급량을 18만 장까지 늘릴 계획이다.
하지만 당장의 수급을 조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종량제봉투 대란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해법을 찾는 일이다. 중동 전쟁 외에 또 다른 전쟁이 갑작스럽게 터지거나 석유 생산량이 급감한다면 ‘제2의 종량제봉투 대란’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결국 석유·가스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태양광과 원전 등으로 적절히 분산해 지속 가능한 에너지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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