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E2030이 보는 제조업의 미래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석좌교수(산업처장 겸 변환경제센터장)
RIE2030 톺아보기 ⑧
입력2026-04-09 09:46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석좌교수
제조업은 가장 오래된 산업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오해받는 산업이기도 하다. 제조 혁신이라고 하면 우리는 여전히 자동화, 로봇, 생산성 향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RIE2030에서 제조는 그런 의미의 효율 개선 대상이 아니다. 이 문서가 제조를 바라보는 방식은 훨씬 근본적이다.
싱가포르의 2030년 국가 전략인 RIE2030(Research, Innovation and Enterprise)에서 제조는 ‘공장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제조가 어떤 자산을 만들어내는가’의 문제다.
전통적인 제조업에서 가치의 핵심은 물건이었다. 더 싸게, 더 빠르게, 더 많이 만드는 것이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이 공식은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원가 절감의 여지는 줄어들었고, 공급망 리스크는 커졌으며, 환경과 에너지 비용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예를 들어 반도체 산업을 보자. 과거에는 더 많은 칩을 더 낮은 가격에 생산하는 것이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반도체 공장은 단순한 생산 시설이 아니다. 공정 데이터를 축적하는 거대한 기술 플랫폼이다. 미세 공정에서 발생하는 수천 개의 공정 변수와 장비 데이터는 기업의 핵심 자산이 된다. 같은 설비를 갖추고도 생산 품질이 다른 이유는 바로 이 데이터 자산 때문이다. 제조 경쟁력은 더 이상 공장의 규모가 아니라, 공정 데이터의 깊이에서 결정된다.
싱가포르는 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RIE2030은 제조를 생산 활동이 아니라 전환 플랫폼으로 재정의한다.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 공정 표준, 에너지 관리 방식, 소재 활용 노하우를 모두 자산으로 전환하는 구조를 설계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스마트 제조는 목적이 아니다. 디지털 트윈, AI 기반 공정 최적화, 자동화는 모두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다. 진짜 목적은 공정 자체가 반복적으로 활용 가능한 자산이 되는 것이다. 공정 데이터는 산업 경쟁력이 되고, 공정 표준은 글로벌 시장에서 협상력이 된다.
예를 들어 항공기 엔진 제조 산업을 보면 이러한 변화가 분명히 드러난다. 엔진을 만드는 과정에서 축적되는 센서 데이터와 유지관리 데이터는 단순한 생산 정보가 아니다. 엔진 제조사는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예측 유지보수 서비스를 제공하고 항공사 운영 효율을 개선한다. 제조 기업이 제품 판매 기업에서 데이터 기반 서비스 기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제조 과정에서 생성된 데이터가 새로운 산업으로 확장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제조와 환경·사회·지배구조(ESG)의 관계다. 전통적으로 제조업의 ESG는 비용이었다. 규제를 맞추기 위해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RIE2030은 이 관계를 뒤집는다. 에너지 효율 데이터, 탄소 관리 데이터, 자원 활용 데이터는 더 이상 보고용 숫자가 아니다. 신뢰 가능한 데이터로 관리되면 투자와 금융의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은 이제 부품 공급업체에게 탄소 데이터를 요구한다. 공급망 전체의 배출 데이터를 관리하지 못하면 계약 자체가 어려워진다. 반대로 탄소 데이터를 정밀하게 관리하고 공개할 수 있는 기업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더 높은 신뢰를 얻는다. ESG 관리 역량이 비용이 아니라 시장 접근성을 결정하는 자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변환경제의 제조다. 제조는 환경 부담의 원인이 아니라 신뢰와 자산을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재설계된다.
싱가포르가 제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조를 단순히 값싼 노동이나 대량 생산의 영역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조는 기술, 데이터, ESG가 가장 밀집되어 전환을 실험할 수 있는 분야다.
싱가포르의 첨단 제조 전략을 보면 이 접근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반도체, 바이오 의약품, 정밀 엔지니어링과 같은 산업을 중심으로 공정 데이터와 기술 역량을 축적하고, 이를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 플랫폼으로 확장한다. 제조 시설 자체가 단순한 생산 거점이 아니라 기술 협력과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중심이 된다.
이 접근은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우리는 제조 경쟁력을 이야기할 때 여전히 생산량과 원가를 중심에 둔다. 그러나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우리 제조 현장은 어떤 자산을 축적하고 있는가. 공정 데이터는 쌓이고 있는가, 아니면 사라지고 있는가. ESG 성과는 비용으로 남아 있는가, 아니면 신뢰로 전환되고 있는가.
예를 들어 한국의 많은 중소 제조기업에서는 생산 데이터를 여전히 장비 안에만 남겨 둔다. 공정 데이터가 표준화되지 않고 축적되지 않으면 산업 전체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반대로 데이터가 산업 플랫폼으로 연결되면 개별 공장의 경험이 국가 제조 역량으로 확장될 수 있다.
RIE2030은 제조업을 구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제조업을 다시 설계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설계의 중심에는 전환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다.
다음 회에서는 제조 다음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도메인, 헬스를 살펴보려 한다. 헬스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과 비용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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