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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의 미디어 풍경] 푼돈에 그친 벌금과 설계된 덫

정재민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메타 등 플랫폼에 ‘SNS 결함’ 배상 판결

청소년 중독 다리 놓은 책임 물은 것

우리도 ‘잘못된 설계’ 묵인 각성해야

입력2026-04-11 05:00

수정2026-04-11 05:00

지면 23면
정재민

정재민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원에서 원고인 20대 여성 케일리는 말했다. “스스로 제한을 두려고 할 때마다 작동하지 않았어요. 그냥 끌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6세부터 유튜브를, 9세부터 인스타그램을 써왔다. 우울증, 자해, 신체 이형증이 뒤따랐다. 올해 3월 법정의 배심원들은 이것이 케일리의 나약함이 아니라 플랫폼의 설계 결함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무한 스크롤, 자동 재생, 끊임없는 알림과 추천. 이 모든 것이 아이의 뇌를 길들인 ‘결함 있는 제품’이었다고.

메타와 구글은 600만 달러(약 81억 원)를 배상하라는 평결을 받았다. 두 회사의 연간 매출 약 6000억 달러의 0.001%다. 연봉 5000만 원인 사람에게 500원짜리 벌금을 부과한 셈이다. 돈의 무게는 가볍다. 그러나 이 판결이 역사적인 이유는 숫자가 아니다. 30년 가까이 “우리는 콘텐츠에 책임 없다”는 면책 조항 뒤에 숨어온 빅테크에 처음으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케일리의 재판은 계류 중인 수천 건 유사 소송의 방향을 결정할 선도 재판이다. 법조계는 1990년대 담배 소송이 업계 전체를 뒤흔든 것에 빗댄다.

법정이 느리게 움직이는 사이 각국 정부는 먼저 행동했다. 호주는 지난해 12월 세계 최초로 16세 미만 청소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이용자가 아닌 해당 플랫폼에 최대 48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한다. 시행 한 달 만에 470만 개의 계정이 사라졌다. 올해 3월에는 인도네시아가 아시아 최초로 같은 조치를 시행했다. 덴마크·브라질·말레이시아도 뒤를 잇고 있다.

담배가 해롭다는 것은 수십 년 전부터 알려졌지만 규제는 한참 후에 뒤따랐다. 미성년자 음주도 마찬가지다. 18세 미만 주류 판매 금지가 항상 완벽하게 지켜지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그 규제 자체가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부 청소년들은 가상사설망(VPN)으로 우회해 SN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문이 좁아지면 들어오는 사람의 수는 줄게 마련이다.

비판도 만만치 않다. 호주 인권위원회는 해당 법이 청소년의 사회 참여를 막아 인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성소수자나 이민 청소년에게 SNS는 사실상 유일한 지지 공동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 싸움의 본질은 하나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중독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플랫폼은 “우리는 다리를 놓았을 뿐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행동에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케일리의 배심원단은 다리 자체가 함정이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금지냐 허용이냐가 아니라 어떤 설계로 보호하느냐다. 케일리의 이야기는 먼 나라 법정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중학생 딸이 스마트폰을 종일 손에서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설계의 덫이 우리 집 안까지 놓여져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플랫폼의 잘못된 설계를 우리 자신부터 묵인해온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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