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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는 왜 연구가 아니라 시스템인가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석좌교수(난양공대 산업처장 겸 변환경제센터장)

RIE2030 톺아보기 ⑨

입력2026-04-16 09:37

조남준

조남준

싱가포르 난양공대 석좌교수

헬스는 시스템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AI 이미지.
헬스는 시스템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AI 이미지.

헬스 분야에서 혁신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새로운 치료제나 첨단 의료기술을 떠올린다. 더 정확한 진단, 더 효과적인 치료, 더 빠른 회복. 분명 중요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RIE2030이 헬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보다 훨씬 넓다.

이 문서에서 헬스는 연구 분야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왜 이런 접근이 필요한가. 이유는 간단하다. 헬스는 더 이상 의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재정과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만성질환, 의료비 증가라는 흐름은 어느 나라에서도 피할 수 없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치료는 정교해지지만 비용은 더 빠르게 증가한다. 치료 중심의 혁신만으로는 이 구조를 바꾸기 어렵다.

실제로 많은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그렇다. 새로운 항암 치료제가 등장할수록 생존율은 높아지지만 치료 비용 역시 급격히 상승한다. 한 환자의 치료 비용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는 경우도 흔하다. 의료 기술은 발전하지만 국가 의료 재정은 점점 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기술 혁신이 곧 시스템 혁신을 의미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RIE2030은 이 지점에서 질문을 바꾼다.

어떤 기술이 더 뛰어난가가 아니라, 어떤 시스템이 비용과 삶의 질을 동시에 바꿀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싱가포르가 주목하는 것은 치료 이후가 아니라 치료 이전이다. 질병이 발생한 뒤의 대응이 아니라 발생 자체를 줄이는 구조다. 예방, 조기 진단, 생활 관리, 데이터 기반 예측이 핵심 키워드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당뇨와 심혈관 질환 같은 만성질환을 보자.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환자가 병원을 찾은 이후에 치료가 시작된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는 건강검진 데이터와 생활 습관 데이터를 활용해 위험군을 조기에 파악하고 관리하는 정책이 강화되고 있다. 개인의 건강 상태를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생활 관리 프로그램과 연결함으로써 질병 발생 자체를 늦추거나 줄이려는 접근이다. 같은 의료 시스템이라도 치료 중심 구조와 예방 중심 구조는 장기적인 재정 부담에서 큰 차이를 만든다.

이 접근에서 헬스 데이터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의료 기록은 병원 안에 갇힌 정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자산으로 전환된다. 개인의 건강 데이터가 적절한 보호와 신뢰 체계 아래에서 축적되면 정책 설계와 재정 관리의 근거가 된다. RIE2030은 헬스를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와 신뢰의 문제로 다룬다.

예를 들어 건강 데이터가 장기적으로 축적되면 질병 발생 패턴을 예측할 수 있고 특정 연령대나 지역에서 나타나는 위험 요인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병원 치료 비용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노동 생산성과 사회 복지 정책에도 영향을 준다. 의료 데이터가 단순한 진료 기록을 넘어 사회 정책의 기반이 되는 순간, 데이터는 비용이 아니라 자산이 된다.

이 지점에서 변환경제의 논리가 다시 등장한다. 의료비는 전통적으로 비용이다. 늘어날수록 부담이 된다. 그러나 헬스 시스템이 예방 중심으로 전환되면 비용 구조 자체가 바뀐다. 치료 비용은 줄어들고 생산성은 유지되며 사회적 자산은 축적된다. 같은 돈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예를 들어 조기 진단 프로그램이 확대되면 암이나 심혈관 질환을 초기 단계에서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초기 치료 비용은 상대적으로 낮고 회복 가능성도 높다. 반대로 질병이 진행된 이후에 치료가 시작되면 비용은 몇 배로 증가한다. 시스템 설계에 따라 같은 의료 기술도 전혀 다른 경제적 결과를 만든다.

싱가포르가 헬스 분야에서 강조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통합이다. 병원, 연구소, 기업, 정책이 분리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RIE2030은 이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다. 기술 개발은 그 안의 한 요소일 뿐이다.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기술은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예를 들어 헬스 기술 스타트업이 새로운 진단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병원 시스템, 보험 체계, 데이터 플랫폼과 연결되지 않으면 실제 의료 현장에서 활용되기 어렵다. 반대로 정책, 병원, 산업이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움직이면 기술은 훨씬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싱가포르는 이 연결 구조 자체를 정책 설계의 핵심으로 본다.

이 접근은 한국에도 익숙하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헬스 혁신을 말할 때 여전히 어떤 기술이 앞서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 모른다. 우리의 헬스 시스템은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는가, 아니면 비용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예를 들어 한국 역시 세계적인 의료 기술과 병원을 갖고 있지만 의료 체계의 상당 부분은 치료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예방과 생활 관리 데이터가 정책과 충분히 연결되지 않으면 의료 시스템은 계속 치료 비용을 확대하는 구조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RIE2030은 헬스를 성장 산업으로만 보지 않는다.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하는 핵심 시스템으로 본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전환하지 않으면 어떤 기술도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다.

다음 회에서는 헬스 다음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영역, 도시를 살펴보려 한다. RIE2030에서 도시는 거주 공간이 아니라 정책과 기술이 실험되는 거대한 테스트베드이기 때문이다.

조남준의 CROSS ECONOMY(변환경제)
조남준의 CROSS ECONOMY(변환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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