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봉쇄가 드러낸 나프타 의존의 민낯
이상엽 KAIST 생명화학공학과 특훈교수
지난달 말 충남 대산항에 마지막 중동산 원유를 실은 유조선이 입항했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되면서 원유 수급과 나프타 생산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한국식품산업협회 등 13개 단체는 정부에 일부 포장재 원료 재고가 2주치에 불과하다는 건의서를 냈다. 라면 봉지, 과자 포장지, 음료 페트병, 배달 용기 등은 모두 나프타로부터 만들어진다. 나프타가 없으면 폴리프로필렌도, 폴리에틸렌도, 페트도 없다. 의료용 주사기도 수액백도 마찬가지다. 비닐 가격은 이미 40% 넘게 뛰었고 5월이면 식품을 생산해도 포장지가 없어 출하 자체가 막힐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병원 응급실의 주사기 하나도 따지고 보면 중동의 유전과 이어진 셈이다. 이것이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의 민낯이다.
이 사태는 단순한 수급 차질이 아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플라스틱 원료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적 취약성이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생물을 이용해 전분당, 목질계 폐기물, 음식 쓰레기 등 바이오매스에서 플라스틱 원료를 직접 생산하는 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도 지난 30여 년간 다양한 석유화학 유래 화학물질들과 플라스틱 등을 바이오로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 왔다. ℓ당 100g 이상의 숙신산, 프로판디올, 나일론 원료, 락탐을 비롯해 미생물 폴리에스터인 폴리하이드록시알카노에이트(PHA) 등 다양한 고분자 화합물을 높은 효율로 생산하는 공정들을 개발했다. PHA는 CJ바이오머티리얼즈가 상용화했고 사탕수수 기반 바이오폴리에틸렌은 브라질 브라스켐이 상업화해 이미 수억 개의 플라스틱병을 생산하고 있다. 미국 네이처웍스 등 전 세계의 여러 회사에서 폴리락트산을 생산 중이다. 바이오 기반으로 원유나 나프타 없이 플라스틱을 생산하는 기술은 있다. 문제는 경제성이다.
바이오 기반 여러 플라스틱의 단가는 석유화학제품보다 2~5배 비싸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기존의 경제성 계산이 얼마나 좁은 프레임 위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공급망이 붕괴했을 때 치르는 사회적 비용, 즉 식품 대란, 의료 소모품 부족, 물류 마비 등은 바이오 플라스틱의 프리미엄 단가를 훨씬 상회한다. 안보와 공급망 회복 탄력성을 경제성 계산에 포함하면 바이오 생산 역량은 오히려 저렴한 보험이다. 독일은 국가 바이오경제 전략을 밀어붙이고 있고 미국 에너지부는 바이오 제조 공장(바이오리파이너리)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이는 환경뿐만이 아닌 공급망 안보를 위한 길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도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은 쓰레기 봉투의 바이오 플라스틱 의무화다. 분리수거와 연계된 의무 구매 구조가 이미 있는 데다 고성능 소재가 필요하지 않으며 생분해성은 환경적 이점이다. 의무화가 이뤄지면 국내 생산자에게 안정적 내수 시장이 생기고 규모의 경제로 단가는 자연스럽게 낮아진다. 의료용 소모품도 단계적 전환 로드맵을 세워야 한다. 동시에 바이오 기반 생산시설을 전략적 비축 인프라로 지정해 세제 혜택, 탄소크레딧, 녹색금융을 연계해야 한다. 한국의 대사공학·합성생물학 역량은 세계 수준이다. 이 기술력을 실험실에서 산업 현장으로 연결하는 스케일업 지원에 정부가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경제성이 다소 떨어져도 국내 생산 능력을 유지하는 비용은 공급망 붕괴로 치르는 대가에 비하면 미미하다.
호르무즈 봉쇄가 가져온 포장재 대란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원유 수입과 의존에 안주한 우리나라에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이 위기가 지나간 뒤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같은 실수를 더 큰 대가를 치르고 반복하게 될 것이다. 쓰레기봉투 하나를 바꾸는 일이 거창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봉투 하나가 국내 친환경 바이오 화학 산업의 시장을 열고 기술의 경제성을 끌어올리며 다음 공급망 충격을 버텨낼 완충재가 된다. 지금 이 위기를 계기로 바이오 기반 필수재 생산 역량 확보를 국가적 과제로 다뤄야 한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석유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나라로 거듭나는 길은 바로 지금 시작하는 정책적 결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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