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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사(寺) 바꾸고 떠난 이창용

강동효 여론독자부장

李, 교육·노동 등 전방위 소신발언

파격적 통화당국 수장 모델 제시해

저성장 탈출 유일 해법은 구조개혁

‘똑똑한 이단아 되라’ 당부 기억해야

입력2026-04-23 18:06

수정2026-04-23 23:36

지면 30면

이창용 한국은행 전 총재가 4년 임기를 마치고 떠났다. 이 전 총재는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적이 많았다. 하지만 ‘키 큰 사람이 싱겁다’는 옛말처럼 190㎝의 장신인 이 전 총재만큼 유머를 갖춘 정책 수장도 드물다. 이 전 총재를 취재한 필자는 여러 가지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2023년 프로젝트파이낸싱(PF) 문제가 불거지며 중견 건설사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검사 출신의 이복현 당시 금융감독원장은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 등이 빠진 자구 계획에 대해 작심 비판을 했다. 금감원의 태도에 놀란 태영 측 최고위 관계자가 이 원장과 대면해 당시 상황을 논의했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가 나왔고 금융위원장이 주도적으로 해야 할 일을 왜 금감원장이 나서느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전 총재에게 ‘태영 관계자가 왜 금융위원장을 패싱하고 금감원장과 면담한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세상 사람들은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다 아는 것 아니겠느냐”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 전 총재는 당시 기획재정부와 한은·금융위·금감원 수장이 참여하는 ‘F4(Finance 4)’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2024년 9월에 있었다. 금통위를 열흘 남짓 남긴 시점에 이 전 총재는 역대 한은 총재로는 처음으로 기재부를 방문했다. 이 전 총재는 “물가를 빠르게 안정시킨 데는 기재부의 노력이 있었다”며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을 추켜세웠다. 당시 시장에서는 금리 결정을 앞둔 묘한 시점에 재정 당국과 통화 당국의 수장이 ‘브로맨스’를 보인 점에 주목했다. 금리 인하를 원하는 정부의 요구에 맞춰 한은이 호응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실제 열흘 뒤 열린 한은 금통위에서 금통위원들은 38개월 만에 금리를 전격 인하하며 피벗에 돌입했다.

이 전 총재는 교육·노동 등 주요 부처 담당자에게는 불편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는 “한은사(寺)에서 벗어나 시끄러운 한은으로 거듭나자”고 제안했고 사회 구조 개혁과 관련한 정책 제안도 서슴없이 내놓았다.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홍콩과 같이 최저임금 적용을 받지 않는 ‘외국인 가사 도우미 도입’이 필요하다는 정책 보고서를 낸 것이 대표적이다.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는 당시 “한은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또 ‘애플플레이션’ 등 농산물 가격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수입 유통 구조 개선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학자 출신의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농업 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분석”이라며 거세게 반발해 한은과 농식품부가 충돌하는 어색한 풍경도 연출됐다.

신혼부부의 원한을 산 일화도 생생하다. 당시 한은은 피벗 이후 원·달러 환율과 부동산 시장의 불안으로 금리 인하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이 2%에도 못 미쳐 통화 당국 수장으로서 난감했는데 그가 찾은 묘안은 정책대출 축소였다. 윤석열 정부의 출생률 제고 정책에 맞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 디딤돌·버팀목 대출에 제한을 가하지 않고는 가계부채 증대와 집값 불안에 대응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는 수차례 정책대출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고 결국 받아들여져 정책대출이 큰 폭으로 감소하게 됐다.

따지고 보면 이 전 총재는 중앙은행 총재로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유형이었다. 퇴임 직전 거취와 관련해서도 “저격 유튜버가 되겠다”고 밝혀 곱지 않은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숱한 논란에도 이 전 총재가 한국 사회에 던진 메시지 중 지금도 유효한 게 있다. 바로 저성장이 고착화하지 않으려면 혁신이 필요하고 이는 사회 전반의 구조 개혁을 통해 가능하다는 제안이다. 그는 한은 직원들에게 “혁신에 나서달라”며 “틀에 얽매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똑똑한 이단아’가 돼라”고 조언했다. 부동산·노동·교육 등 여전히 산적한 고질적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사회가 계속 새겨들어야 할 말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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