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이후, 한국 기업이 고를 곳은 ‘싼 곳’이 아니다
■전혜원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코리아 부장
입력2026-04-27 10:01
전혜원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코리아 부장
봉쇄가 시작된 2월 말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던 유조선들이 멈춰 서자 전쟁에 대한 피해가 뉴스만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한국 산업이 매일 소비하는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헬륨, 석유화학의 나프타, 그리고 브로민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해협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도 위에 조용히 드러났다. 한국은 2025년 7097억 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 역대 가장 많은 규모이며 수출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44%다. 반도체, 석유화학, 물류 등 우리 산업 거의 전부가 이 숫자 위에 올라가 있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떤 계기로 흐름이 멈추는 순간 비로소 드러나는 종류의 숫자다.
호르무즈가 그 계기였다. 한국으로 들어오는 원유의 약 70%, LNG의 약 20%가 이 해협을 통과한다. 4월 중순 기준 국내 석유 비축량은 한 달 치 이하로 줄었다고 보도됐다. 해협 인근에는 우리 국적 유조선 일곱 척이 발이 묶여 있다. 4월 8일 미국과 이란 사이에 휴전이 발효됐지만, 그 뒤로도 통과한 선박은 45척 남짓에 불과하다. 바다는 조용해졌지만, 물류는 아직 다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영향은 에너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이 쓰는 헬륨의 약 65%가 카타르에서, 브로민의 약 90%가 이스라엘에서 온다. 헬륨은 반도체 웨이퍼 냉각에 꼭 필요한, 대체재가 없는 물질이다. 카타르 라스라판 산업단지가 공격을 받고 해협이 막히면서 헬륨 현물 가격은 두 배로 뛰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공급을 제한하며 운영 중이라고 보도했고,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도 불가항력(force majeure) 통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나프타 부족으로 인한 피해는 하류 공정으로 조용히 번지고 있다.
‘니어쇼어링은 비싸다’는 오래된 프레임
지금까지 해외 거점을 현지 시장 가까이로 옮기는 ‘니어쇼어링’ 논의는 대체로 비용이라는 단어 주변을 맴돌았다. 현지 인건비가 높다, 생산을 나누면 효율이 떨어진다, 중복 투자에는 오버헤드가 따른다. 모두 맞는 얘기다. 한국 경영진은 이 계산에 누구보다 익숙하다. 다만 호르무즈 이후, 질문 자체가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니어쇼어링이 서류상 얼마나 더 비싼가’가 아니라, ‘기존의 글로벌 공급망이 여전히 우리가 기대해 온 만큼의 접근성을 돌려주고 있는가’이다. 단 하나의 교란이 원유와 LNG, 헬륨과 나프타, 브로민을 한꺼번에 건드릴 수 있는 환경에서 그 접근성은 과거만큼 자명하지 않다.
한국처럼 산업 기반의 대부분이 수입 연료와 원자재 위에 놓인 나라에서 이 질문은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모든 생산을 해외로 옮기자’는 뜻은 아니다. 기업은 여전히 비용을 협상할 것이고, 업종에 따라 속도는 다를 것이다. 다만 앞으로의 해외 진출을 움직이는 근본 축이 ‘비용 절감’에서 ‘접근성 보호’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고객에 대한 접근, 에너지에 대한 접근, 원자재에 대한 접근, 그리고 외부 환경이 흔들릴 때에도 계속 작동하는 관할권에 대한 접근. 운영비가 조금 더 들더라도 이런 것들을 지켜주는 모델이 결과적으로 더 단단한 선택일 수 있다. 이 전환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우리가 오래 품어온 세 가지 전제
호르무즈 이전, 우리 기업들이 해외 투자를 논의할 때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전제가 있다. 대체로 맞는 이야기였다. 다만 이번 일을 지나면서 하나씩 다시 꺼내어 볼 필요가 생겼다. 첫 번째는 해외 진출의 본질을 ‘규모와 비용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다. 어디가 더 크고, 어디가 더 싼가. 오랫동안 이것이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이었고, 이 질문에 답한 기업들이 글로벌 플레이어가 됐다. 다만 지금은 이 질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대체할 수 없는 원자재, 안정적인 에너지, 외부 환경이 흔들려도 움직이는 생산 기반... 이런 ‘접근성’의 확보가 규모나 원가 못지않게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두 번째는 이런 고민이 ‘중후장대 산업’의 몫이라는 인식이다. 석유화학이나 정유, 철강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번 충격을 가장 예민하게 받은 곳은 반도체다. 헬륨 한 가지 물질의 수급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운영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소비재와 물류도 운임과 연료비를 통해 같은 압력 위에 있다. 업종은 다르지만, 질문은 같다. 어디에 있으면, 무엇이 흔들려도, 계속 만들 수 있는가.
세 번째는 ‘이 전환은 천천히 오겠지’라는 전제다. 실제로는 이미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정부는 수출입은행을 통해 최대 10조 원 규모의 공급망안정화기금을 운영하며 수입처 다변화를 지원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을 비롯한 전기차·배터리 기업들은 미국 내 생산 거점을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넓혀 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공급망의 흔들림을 ‘일시적’이 아니라 ‘구조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이 속도는 지금 예상의 두 배로 갈 수도 있다. 먼저 움직인 기업과 나중에 움직인 기업의 간격은, 지난 몇 번의 전환기에서 그랬듯 생각보다 크게 벌어질 것이다.
경영진이 바꿔야 할 질문
오랫동안 해외 거점을 고를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은 ‘이 선택이 얼마나 더 비쌀까’였다. 합리적인 질문이었고, 여전히 필요한 질문이다. 다만 이제 그 옆에 또 하나의 질문이 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접근성을 잃었을 때의 비용은 얼마일까.”
이 두 질문을 나란히 두는 순간, 의사결정의 풍경이 달라진다. 더 비싼 모델이 반드시 덜 합리적인 모델은 아니라는 것. 시장 접근을 지키고 공급선을 짧게 하고 단일 요충지에 대한 노출을 줄여 ‘중단 없는 운영’을 확보한다면, 그 비용은 비용이 아니라 일종의 보험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한국 기업이 사들여야 할 것은, 그 보험일지도 모른다는 것.
해외시장과 현지 자문사들도 이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인건비가 싸다, 부동산이 저렴하다’는 말이 한국 기업을 움직이는 제안이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귀사의 고객과의 거리를 짧게 해주고, 물류 연속성과 공급 안정을 지켜줄 수 있다’는 쪽으로 제안의 언어가 바뀌고 있다. 우리가 어떤 제안에 귀를 더 열어야 하는지, 무엇을 기준으로 해외 파트너를 평가해야 하는지도 이 변화와 함께 달라진다.
호르무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 사태가 해결된 이후에도, 오늘 드러난 질문 자체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 기업의 다음 10년은, 비용의 언어가 아니라 접근성의 언어로 쓰여질 가능성이 높다. 그 전환을 먼저 읽고 먼저 움직이는 쪽이, 다음 시장의 모양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She is...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코리아 부장이자 글로벌 코리아 데스크(Global Korea Desk) 팀장이다. 한국 대기업의 해외 부동산 전략과 크로스보더 상업용 부동산 자문을 전담한다. CBRE 코리아, JLL 코리아를 거쳤으며, 그 이전에는 SBS CNBC 경제부 방송 취재기자와 CNBC 아시아 ‘코리아 리포트’ 진행자,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CCIM(Certified Commercial Investment Member) 인증을 보유했고, 개인 뉴스레터 ‘Korea Capital Decoded’를 통해 한국 자본의 글로벌 흐름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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