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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국회의원의 ‘논문’ 만능주의 [김호균의 K-행정, 혁신의 길을 묻다]

김호균 전남대 행정학과 교수

입력2026-04-30 17:55

수정2026-04-30 17:58

김호균

김호균

전남대 행정학과 교수

논문 양산 교수를 묘사한 AI 이미지.
논문 양산 교수를 묘사한 AI 이미지.

최근 모 국회의원이 거점 국립대 교수들을 대상으로 ‘해당 연도에 논문을 쓰지 않은 사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는 소식은 참담함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대학 교수를 컨베이어 벨트 앞의 노동자처럼 취급하는 이러한 행태는 학문의 본질에 대한 무지와 천박한 성과주의의 극치다. 인류의 지평을 넓히는 연구자들에게 매년 기계적인 실적을 독촉하는 것은 결국 ‘가짜 지식’과 ‘쓰레기 논문’을 양산하라는 강요나 다름없다.

학술 연구는 마라톤보다 긴 호흡을 요구하는 창의적 여정이다. 350년 된 난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풀어낸 앤드류 와일즈는 7년 동안 단 한 편의 논문도 쓰지 않고 침묵 속에 연구에 몰두했다. 노벨상 수상자 피터 힉스 역시 1964년의 혁신적 논문 이후 수십 년간 실적을 내지 않았으며, 오늘날의 실적 압박 문화에서는 본인의 발견이 불가능했을 것이라 경고했다. 만약 이들이 한국의 국립대 교수였다면, 정치권의 사유서 추궁을 견디다 못해 위대한 발견의 싹을 잘랐을지도 모른다.

해외 선진국들은 이미 ‘논문 편수 세기’의 함정에서 벗어났다. 미국 대학교수 협회(AAUP)는 2024년 성명을 통해 정치권의 고등교육 개입이 “우려스러운 수준(alarming level)”에 도달했다고 경고하며, 특정 연구 주제를 검열하거나 실적을 압박하는 행위는 대학이 ‘자유로운 탐구의 장’으로서 공공의 이익에 봉사할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과 해외 대학의 논문 관행 비교.
한국과 해외 대학의 논문 관행 비교.

미국 하버드나 스탠포드 역시 종신 재직권(Tenure) 심사에서 “논문 몇 편을 썼느냐”는 산술적 공식을 철저히 배제한다. 하버드 대학교(FAS)는 최소 논문 편수 기준 없이 오로지 해당 분야의 지도를 바꾼 ‘고영향력 기여(High-impact contributions)’만을 심사하며, 후보자를 세계적 석학들과 직접 대조하는 ‘비교 대상자 리스트(Comparand Exercise)’를 통해 질적 수월성을 검증한다. 스탠포드 대학교는 연구자가 기존 지식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평을 여는 ‘수사적 독립성(Investigative Independence, 연구자 개인이 독창적인 연구 의제를 설정하고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가장 중요한 척도로 삼는다.

반면, 우리 정치권이 강요하는 양적 압박은 학계를 병들게 한다. 하나의 연구를 여러 편으로 쪼개는 ‘살라미 슬라이싱’이 횡행하고, 연구자들은 실패 가능성이 높은 도전적 주제 대신 결과가 뻔한 평이한 주제에만 매달린다. 이는 결국 한국 학계의 국제적 신뢰도를 갉아먹는 자해 행위다.

우리 헌법 제31조 제4항은 대학의 자율성을 명시적으로 보호하며 , 대법원은 학술적 성과 판단이 전문가 공동체의 몫임을 명확히 했다. 정치권은 개별 교수의 논문 편수를 감시하는 검열관 노릇을 당장 멈추라. 대학은 정치적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 탐구의 최후 보루여야 하기 때문이다.

김호균의 K- 행정, 혁신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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