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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눈] 외양간 고치다 소 먼저 잃는다

박정현 마켓시그널부 기자

입력2026-05-05 23:07

지면 30면
서울 여의도 증권가. 연합뉴스
서울 여의도 증권가. 연합뉴스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이 나와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지난해 말부터 기업공개(IPO) 관계자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돌고 있는 말이다. 중복상장 논란이 이어지면서 한국거래소와 금융 당국이 관련 가이드라인 마련에 나섰지만 발표 시점이 계속 미뤄지자 한탄이 길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당초 거래소는 올 1분기 안에 중복상장 관련 가이드라인을 내놓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LS그룹의 에식스솔루션즈 상장 철회 이후 이 문제가 단순한 시장 논쟁을 넘어 정책 이슈로 번지면서 발표 시점은 6월로 밀렸다.

문제는 가이드라인을 늦춘다고 시장의 혼선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규제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공백 기간이 길어질수록 상장을 준비하던 기업들은 일정 조정과 투자자 설득이라는 이중 부담을 떠안게 됐다. 시장의 불확실성이 길어지는 사이 IPO 시장은 빠르게 위축됐다. 실제 올해 들어 공모 규모는 전년 대비 절반 가까이 쪼그라들었다.

더 큰 문제는 상장이 막힌 기업들의 후폭풍이다. 상당수 기업은 재무적투자자(FI)와의 약정에 따라 일정 기간 내 IPO를 추진해야 한다. 상장이 지연되거나 무산되면 모회사가 FI 지분을 되사주거나 투자금을 상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는 셈이다. 중복상장을 막겠다는 취지가 기존 주주 보호라면 모회사의 현금 유출이 커지고 재무 부담이 확대되는 것도 함께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이유다.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모회사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도 배제하기 어렵다.

물론 중복상장 문제를 방치할 수는 없다. 모회사가 핵심 사업부를 떼어내 상장하고, 기존 주주 가치가 희석되는 구조에 대한 비판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주주 보호 장치를 마련하고 기업 지배구조를 손보는 작업 역시 필수적이다.

외양간을 고치는 일은 막을 수 없지만 소를 잃은 뒤라면 늦다. 중복상장 제한을 통해 시장의 불공정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하지만 정상적인 자금 조달 통로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 기업과 투자자가 예측 가능한 규칙 안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압박이 아닌, 시장에 산재한 불확실성을 먼저 걷어내야 한다. 중복상장 관련 혼란이 길어질수록 잃는 것은 일부 기업의 상장 기회뿐만이 아니라 주주가치 자체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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