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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헌 칼럼] 에너지 정책, 우선순위 재정립해야 할 때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

탄소중립 목표에 안보·경제성 후순위로

원전 확대 등 에너지원 균형·다변화 시급

산업경쟁력 고려한 정책 재설계 나서야

입력2026-05-12 05:00

수정2026-05-12 05:00

지면 30면

세계 에너지 질서는 지금 ‘위기의 일상화’라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든 가운데 이란 전쟁 중에 최악의 시나리오로 여겨졌던 호르무즈해협 봉쇄까지 현실화되며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은 한층 커졌다. 여기에 더해 세계적 지정학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이 언급한 ‘미국 없는 세계 질서’가 가시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동 석유는 더 이상 미국의 핵심 이익이 아니다”라는 발언은 중동을 군사적으로 방어하겠다는 카터 독트린의 후퇴로 읽힌다. 이제 호르무즈해협의 안전도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불안정한 세계 질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탄소중립 에너지 전환 자체도 새로운 위기 요인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예상하지 못한 자연 변화로 수급 균형이 급격히 붕괴되는 위기 가능성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2021년 유럽은 풍력 발전량 급감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며 전력가격이 3배 이상 치솟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 탄소중립 정책은 화석연료 투자 위축을 초래하고 있다. 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화석연료 소비 전망을 낮추면 민간 기업은 이를 거슬러 투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망과 달리 실제 수요가 거꾸로 증가하게 된다면 공급 부족은 구조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이러한 위험에 특히 취약하다. 석유와 가스를 사실상 전량 수입에 의존하면서도 에너지 다소비 산업 비중이 높고 재생에너지 자원 여건은 제한적이며 전력망은 외부와 연결되지 않은 고립형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에서 에너지 안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한국의 에너지정책은 ‘탄소중립’이라는 단일 목표에 과도하게 경도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너지정책 관련 최상위 법령인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에서 배출 감축 목표가 설정되면 모든 에너지 계획이 이에 종속되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 안보와 경제성은 구조적으로 후순위로 밀린다. 예컨대 장기 액화천연가스(LNG) 도입 계약은 수요 감소를 전제로 한 정책 환경에서는 체결이 쉽지 않다. 그러나 최근 위기에서 확인했듯 원자력발전과 화석연료, 안정적 가스 공급은 여전히 핵심적인 위기 대응 수단이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보다 냉정한 인식도 필요하다. 에너지 안보는 필요한 시점에 공급이 가능한 에너지가 충분히 확보될 때 높아진다. 그러나 풍력과 태양광은 간헐성이라는 본질적 한계로 말미암아 공급 시점이 수요와 일치하지 않는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곧 에너지 안보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물론 저장장치로 보완할 수 있으나 현재 기술과 비용 수준에서는 대규모 시스템 안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결국 에너지 안보는 특정 에너지원의 배제가 아니라 다양한 에너지원의 균형과 도입선 다변화를 통해 확보된다. 원전 확대, 석탄의 전략적 유지, LNG 장기계약은 모두 현실적 선택지다. 문제는 이러한 전략이 현행 탄소중립 목표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탄소중립 목표 역시 에너지 안보와의 양립성과 실현 가능성을 기준으로 재조정될 필요가 있다. 탄소중립은 중요한 목표지만 조정이 불가한 절대적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에너지 안보를 중심에 두고 경제성과 환경성을 균형 있게 고려하는 새로운 정책 질서가 요구된다. 주요국들도 이미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기후정책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있으며 유럽 역시 산업 경쟁력과의 조화를 고려한 정책 재설계를 진행 중이다. 에너지정책은 더 이상 환경정책의 하위 범주가 아니라 국가 안보이자 산업 및 경제의 핵심 기반이다.

현재 우리는 탄소 문명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탈탄소 속도만 강조하는 접근은 기후변화보다 더 큰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 탄소중립 에너지 전환은 사실상 문명 전환 과정이다. 문명 전환은 불과 몇 십 년 만에 뚝딱 해치울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급작스러운 단절이 아니라 완만한 곡률의 변화를 거쳐 수 세기 동안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목표의 단순화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재정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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