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경 원 에너지 시장, 뭉쳐야 길이 열린다
김동철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공지능(AI)한테 시키면 10분도 안 걸립니다.”
요즘 어딜 가도 심심치 않게 듣는 말이다. 이전에는 사람이 밤을 새워 작업했던 방대한 데이터 분석을 AI가 순식간에 끝내고 명령어 한 줄로 할리우드급 영상도 뚝딱 만들어낸다. 최근에는 일본 최상위 수준인 도쿄대 시험에서 AI 최신 모델들이 수험생을 넘어선 최고 성적을 기록해 놀라움을 줬다.
많은 사람들이 AI의 발전 속도에 환호하지만 이 모든 혁신을 가능하게 만든 힘은 따로 있다. AI의 심장인 데이터센터를 24시간 돌아가게 하는 ‘전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과거에는 전기가 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역할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국가 성장을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전기의 달라진 가치에 주목한 주요국들은 미래 산업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에너지 시장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붓고 있다. 블룸버그는 향후 2050년까지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 31경 원(약 213조 달러)가량이 누적 투자될 것으로 전망했다. 반도체·로봇·배터리 등 글로벌 핵심 산업에 못지않은 큰 시장이 새로 열린다는 뜻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의 무대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쯤 서 있을까. 냉정하게 말해 아쉬움이 크다. 세계적으로 기업가치만 10억 달러가 넘는 에너지 유니콘 기업이 118개나 탄생하는 동안 정보기술(IT) 강국을 자부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단 한 곳도 나오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급격하게 팽창 중인 글로벌 에너지 신시대에는 혁신 기술의 개발과 사업화는 물론 이를 뒷받침할 시장과 제도가 촘촘하게 설계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나라가 새로운 기회를 선점하려면 기술·시장·정책이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함께 돌아가야 한다.
주요국들은 이미 원팀으로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덴마크의 ‘에너지 아일랜드(Energy Island)’ 프로젝트가 대표적 사례다. 정부와 의회가 큰 그림을 그리면 오스테드 등 민간기업이 자본과 기술을 보태고 덴마크공과대가 핵심 연구개발(R&D)을 주도했다. 이렇게 산학연관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력한 덕분에 과거 석유파동으로 휘청이던 에너지 수입국 덴마크가 지금의 재생에너지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우리도 올해 4월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뎠다. 기후에너지환경부와 한국전력이 손잡고 ‘전력산업 산학연관 전문 포럼’을 출범시킨 것이다. 110여 명의 국내 최고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에너지 신사업 모델 발굴에 힘을 쏟는 것은 물론 불필요한 규제를 꼼꼼히 선별해 개선해나갈 예정이다. 나아가 한전기술지주회사와 연계한 기술 사업화부터 혁신기업 기술이전까지의 전 과정을 막힘없이 연결하는 ‘패스트트랙’ 역할도 톡톡히 해낼 것이다.
모든 경제와 산업의 중심이 전기 중심으로 바뀌면서 글로벌 산업 패권도 ‘석유’에서 ‘전기’로 이동하고 있다. 이번에 출범한 포럼을 구심점 삼아 모두가 함께 힘을 모으면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도 31경 원의 에너지 신시장을 충분히 주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 에너지 안보 강화, 그리고 국가 경쟁력 제고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자녀 세대들에게 당당한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골든타임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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