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 세터’ 도약 절실한 한국 제조업
정주용 그래비티벤처스 대표
입력2026-05-18 17:27
정주용
그래비티벤처스 대표
초지능 기술을 앞세워 압도적으로 달아나려는 패권국 미국과, 더 빠른 경제성장률로 그 뒤를 맹렬히 추격하는 중국. 오늘날 G2의 패권 경쟁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두 패권국은 거대 양강으로서 1대1로 정면 충돌하기보다, 혁신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주변국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 수탈적으로 분할 지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과거 영국의 산업혁명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증기기관과 기계화로 무장한 영국과 유럽의 열강들은 산업혁명의 혁신 기차에 올라타지 못한 낙후된 국가들을 식민지화하며 세계를 분할 통치했다. 세기가 바뀐 지금도 본질은 같다. 인공지능(AI), 로봇, 우주 산업이라는 거대한 기술 혁신의 결실을 가장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국가 역시 미국과 중국이다. 그리고 이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지정학적, 경제적 욕망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우리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당연하게 여겨왔던 국제법과 국제사회의 공존 윤리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근대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의 지적대로, 국제사회는 본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힘이 없으면 양대 패권국의 전략적 협상 카드로 전락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최근 지정학적 위기의 중심에 선 대만이 바로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유일한 진리는 결국 ‘힘의 논리’다.
이 냉정한 정글에서 대한민국이 안정 속에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선택해야 할 길은 명확하다. 스스로 힘을 키우는 것뿐이다. 우리는 더 빠르고 과감하게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우주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천만다행인 것은 인류의 미래를 바꿀 이 세 가지 핵심 산업이 모두 한국의 ‘K-반도체’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AI 연산을 위한 고성능 메모리, 휴머노이드 로봇의 두뇌와 감각을 담당할 시스템 반도체, 우주 발사체와 위성에 탑재될 극한 환경용 반도체까지 한국의 기술력 없이는 이 거대한 혁신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라는 고립된 성(城) 하나만으로는 거센 패권의 파고를 막아내기 어렵다. 이제는 한국이 이미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조선, 방산 등 첨단 제조업에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 산업을 유기적으로 융합해야 할 때다. 제조 공정의 지능화와 로봇화를 넘어, 우리가 만드는 선박과 무기체계 자체가 AI와 휴머노이드 기술로 무장한 초격차 제품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러한 융합은 이미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HD현대중공업 등 국내 조선사들은 디지털 트윈과 AI를 결합한 스마트 조선소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보스턴 다이나믹스와의 협력을 통해 휴머노이드 로봇을 조선소 현장에 투입해 용접·자재 이동 등 고위험 작업을 자동화하는 실증을 진행 중이다. 한국은 이미 제조업 로봇 밀도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근로자 1만 명당 1,220대). 이는 단순한 공정 자동화를 넘어, 우리가 만드는 선박과 무기체계 자체가 AI와 휴머노이드로 무장한 초격차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인 것이다.
‘첨단 제조업의 도약적 레벨업’이야말로 대한민국이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고래 싸움 속에서 새우등 터지는 신세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우리가 대체 불가능한 기술적·산업적 요충지를 쥐고 있을 때, 비로소 누구도 함부로 흔들 수 없는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독립적 지위’는 단순히 자급자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중 양측이 모두 필요로 하는 기술적·산업적 필수 불가결한 허브로서,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할 수 없는 플레이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중견국 한국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형태의 전략적 자율성인 것이다. 우리가 단순한 ‘카드’가 아니라 ‘규칙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주체’가 될 때, 비로소 패권 경쟁의 파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위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협상 테이블 위의 카드가 될 것인가, 아니면 테이블의 규칙을 좌우하는 플레이어가 될 것인가. 대한민국의 명운은 지금 우리의 과감한 융합과 결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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