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듣기

  • 글자 크기

    글자 크기 설정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 기사 공유

  • 북마크

  • 다크모드

  • 프린트

네이버 채널구독

다음 채널구독

미국의 ‘빌드 히어(Build here)’ 주문 속 우리 기업의 셈법은

입력2026-05-20 05:00

수정2026-05-20 05:00

전혜원

전혜원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코리아 부장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2026 SelectUSA 인베스트먼트 써밋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제공=SelectUSA 공식 홈페이지‘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2026 SelectUSA 인베스트먼트 써밋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제공=SelectUSA 공식 홈페이지‘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팔고 싶다면, 여기서 지어라. 여기서 지어라. 미국 시장에 접근하고 싶다면 미국 노동자를 고용해서 이곳에서 하라(If you want to successfully sell in the United States, build here. Build here. If you want to access our markets, hire our workers and do it here).”

연단의 하워드 러트닉이 ‘Build here’를 두 번 반복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전략투자 협상에서 핵심 창구 역할을 맡고 있는 미 상무장관. 9·11 테러로 직원 658명을 잃고도 캔터피츠제럴드를 재건한 인물이다. 최근 한미 무역·관세 협상의 후속 협의를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이끌며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전략투자의 이행 프레임을 짜는 미국 측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Build here’는 그가 SelectUSA Investment Summit 연단에서 한자리에 모인 글로벌 자본 앞에 던진 강령이었다. SelectUSA는 미국 상무부가 매년 주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외국인 직접투자(FDI) 행사다. 포토맥 강변, 게일로드 내셔널 리조트. 19층 유리 아트리움이 강과 워싱턴 D.C. 너머를 굽어보는 곳. 7월 4일 미국 건국 250주년을 두 달 앞둔 봄, 미국은 다음 250년에 필요한 자본을 불러 모았다. 100여 개국에서 5500명이 모였다. 그리고 미국 전역의 경제개발 수장들이 그들을 맞았다. 연방에서 주, 카운티, 도시까지 한 무대에서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객석에서 가장 큰 외국 대표단 가운데 하나는, 한국이었다.

왜 지금인가

행사장은 박람회라기보다 콘서트장에 가까웠다. 텍사스, 조지아, 미시간, 오하이오, 사우스캐롤라이나. 미국 제조업 벨트의 주들이 내건 기치는 ‘Made in America’가 아니라 ‘Build It Here’였다. 미국 것을 사라가 아니다. 미국에 지어라. 자본의 물리적 이전을 요구하는 메시지였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1년이 훌쩍 지난 시점. 관세는 다시 한국 기업 손익계산서의 한복판에 들어와 앉았다. 미국 내 생산기지 확보는 전략적 선택지가 아니라 사업의 전제 조건이 됐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모든 일이 한국 증시 사상 최고치 갱신과 함께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건스탠리는 지난 13일 코스피 목표치로 9500을, 강세 시나리오에선 1만선 돌파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보고서의 키워드는 “구조적 성장과 개혁의 지속성.”

서울의 자본시장이 끓는 그 시간, 같은 자본의 일부는 워싱턴에서 다음 행선지를 찾는다. 모순이 아니다. 한국 기업의 글로벌 자본 배치 능력이 한 단계 올라섰다는 신호이자, 국내에서 답을 찾기 어려운 성장의 일부를 밖에서 메워야 한다는 압박이다.

그래서, 어떻게 짓는가

“전력이 필요한가? 우리가 지어주겠다. 노동자가 필요한가? 지역 대학과 협약을 맺어 훈련시켜 주겠다(You need power? We will build it for you. You need workers? We will make a deal with the local universities, and we will train them for you).”

러트닉 장관은 같은 키노트에서 외국 자본이 미국 진출에서 가장 자주 부딪히는 두 병목인 전력과 노동력을 상무부가 직접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미국 땅에서 지어본 우리 기업들은 안다. 현장의 시계는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미국에 공장을 짓는 일은 아시아에서 짓던 방식을 그대로 복사 놓는 일이 결코 아니다. 부지, 인센티브, 그리고 노동 비용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다. 그러나 결정적 변수는 전력 인입 일정, 환경 영향 평가, 다층적 인허가, 그리고 숙련된 인력의 단계적 확보다. 그리고 이 모두가 본사가 각 주 정부에 약속한 가동 일정과 맞아떨어지느냐의 문제다.

특히 전력이 그렇다. 러트닉이 “지어주겠다”고 한 그 전력이다. 부지를 사고 인센티브를 협상하고 설계가 끝나도, 송전선 에너자이제이션이 본사 일정보다 12개월, 길게는 24개월 뒤로 밀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인센티브는 채용·생산·투자 마일스톤에 묶여 있다. 전력 일정이 흔들리면 그 뒤가 도미노다.

마지막은 인력이다. 가동 초기 한국 본사의 숙련 인력이 일정 기간 현장에 들어와야 한다. 설비 셋업, 운영 노하우 이전, 라인 안정화. 이 단계가 흔들리면 그다음이 모두 흔들린다. ‘Trainable local workforce’와 ‘workable visa pathway’, 둘 다 갖춰져야 프로젝트가 일정 안에 들어온다. 지역 대학과의 협약만으로는 메워지지 않는 단계가 분명히 있다는 뜻이다.

러트닉의 약속과 현장의 시계 사이, 그 12~24개월의 간극에 한국 기업의 자본이 묶여 있다.

미국과 주요국 관계자가 ‘2026 SelectUSA 인베스트먼트 써밋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SelectUSA 공식 홈페이지
미국과 주요국 관계자가 ‘2026 SelectUSA 인베스트먼트 써밋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SelectUSA 공식 홈페이지

같은 주, 워싱턴의 또 다른 장면

SelectUSA가 끝난 직후인 8일. 사흘 전 무대에 섰던 러트닉이 이번엔 상무부 청사에서 김정관 장관과 마주 섰다. 한미 조선 파트너십 이니셔티브(KUSPI) 양해각서.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는 트럼프의 ‘MAGA’ 슬로건을 차용한 한국 측 작명이지만, 그 안의 구조는 한국이 가장 잘 아는 영역인 조선을 미국 산업 재건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의 협상이다. 자동차·반도체·배터리에 이어 조선이 대미 협력의 새 축으로 들어섰다. 한국이 짊어질 청구서 한 장이 더 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주 서울. 12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김 장관에게 “외교부나 안보실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전에 협의도 좀 하고, 다른 부처와 협의를 미리 잘해달라”고 공개 주문했다. 방미 협상 내용이 외교부 등과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그 배경이다.

두 장면이 함께 가리키는 바는 분명하다. 미국으로 향하는 한국 자본의 모멘텀은 기업 혼자 만들지 못한다. 기업의 자본 배치, 정부의 외교·통상·안보 라인, 미국 측 연방·주·지방. 세 겹의 시계가 같은 박자로 돌아갈 때 비로소 프로젝트는 완성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자본도, 의지도, 기술도 아니다. 이 박자를 맞추는 코디네이션의 근육이다.

모멘텀, 혹은 관성

우리가 던질 진짜 질문은 ‘미국으로 갈 것인가’가 아니다. 방향은 이미 관세가, 고객사의 현지 생산 요구가, 안보 협상의 끈이 정해두었다. 진짜 질문은 다른 자리에 있다. 미국으로 향하는 자본의 크기·속도·회수 시점을, 중국·동남아·유럽·중동에 분산된 한국의 다른 자본 배치와 어떻게 정합성 있게 조율할 것인가.

호르무즈의 긴장, 미·중 디커플링, 우크라이나 전선의 장기화, 한반도의 안보 셈법. 리스크 표면들이 동시에 진동하는 가운데, 미국 베팅의 적정 사이즈는 어디까지인가. 한 곳에 너무 깊이 들어가면 다른 곳에서의 운신 폭이 줄어든다. 모건스탠리 코스피 9500의 자신감 일부는, 사실 이 베팅들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을 때의 시나리오에 기대고 있다.

모멘텀(momentum) 안에는 두 개의 의미가 같이 들어 있다. 흐름을 만들어내는 운동량. 그리고 흐름에 떠밀리는 관성. 이 둘은 다르다.

워싱턴 DC를 떠나는 길, 우드로 윌슨 브리지를 건넜다. 워싱턴 D.C.·메릴랜드·버지니아, 세 행정 관할이 한 다리에서 만나는 미국 유일의 다리. 우버 기사가 흘리듯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둘 중 하나죠. 사업을 만들러 왔거나, 그 사업의 한 조각이라도 얻으러 왔거나.”

코스피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그 시점에, 한국 자본의 일부는 워싱턴으로, 텍사스로, 조지아로 향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주체적으로 만든 모멘텀인지, 외부 압력이 우리를 떠미는 관성인지. 그 답은 워싱턴이 아니라, 결국 서울의 회의실에서 - 한국 기업의 장기적 성장과 성공을 두고 실무자와 임원진들이 마주 앉는 자리에서 - 잘 결정되길 바란다.

She is...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코리아 부장이자 글로벌 코리아 데스크(Global Korea Desk) 팀장이다. 한국 대기업의 해외 부동산 전략과 크로스보더 상업용 부동산 자문을 전담한다. CBRE 코리아, JLL 코리아를 거쳤으며, 그 이전에는 SBS CNBC 경제부 방송 취재기자와 CNBC 아시아 ‘코리아 리포트’ 진행자,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CCIM(Certified Commercial Investment Member) 인증을 보유했고, 개인 뉴스레터 ‘Korea Capital Decoded’를 통해 한국 자본의 글로벌 흐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 서울경제신문,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다음
이전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