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하나 남아” “끝나야 끝난다”…삼성 합의 이끈 김영훈·박수근
삼성전자 노사, 합의까지 ‘롤러코스터’
박수근, 깜깜이 교섭 관행 깨고 이견 좁혀
회의장 기척·노조 조끼 탈의도 ‘일희일비’
사후조정 불발 4시간 만에 극적 ‘교섭 재개’
김영훈, 대화 우선 교섭 원칙 끝까지 지켜
입력2026-05-21 11:37
수정2026-05-21 11:43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누가 그런 얘기 해요.”
20일 삼성전자 노사의 2차 사후조정이 열렸던 정부세종청사 중앙노동위원회 3층. 끝내 사후조정이 불발됐다. 노조 파업을 막을 막판 카드로 거론됐던 긴급조정권 발동 논의를 시작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수근 중노위원장이 일축하며 한 말이다. 당시 현장은 결국 정부가 파업을 강제로 막는 긴급조정권 수순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추측들이 커지던 상황이었다. 전날까지만하더라도 “노사 쟁점이 하나 남았다”던 박 위원장이 결렬 소식을 알렸기 때문이다. 박 위원장은 손꼽는 원로 노동법학자이자 노사 조정 최고 전문가로서 삼성전자 사후조정을 직접 이끌었다. 그가 좁히지 못한 노사 쟁점이라면, 사실상 타결 불가능한 영역일 수 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나기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고용노동부는 김영훈 노동부 장관이 사후조정 결렬 당일 오후 4시부터 삼성전자 노사의 교섭 재개를 성사시키고 직접 중재에 나섰다고 밝혔다. 결국 같은 날 오후 10시 30분쯤 노사는 잠정합의문에 극적으로 서명했다. 김 장관은 교섭 결과를 설명하면서 “박수근 위원장이 계속해서 간극을 많이 좁혀 주셨고, 남아있는 마지막 쟁점을 조율하는 데 큰 역할을 해주셨다고 생각한다”고 공을 돌렸다. 박 위원장의 단호함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설계를 팹리스가, 제조를 파운드리가 맡는다. 노사 타결의 밑그림을 그린 ‘팹리스’가 박 위원장이었다면, 막판 결렬 위기의 판을 넘겨받아 최종 합의라는 결과를 찍어낸 ‘파운드리’는 김 장관이었던 셈이다.
실제 삼성전자 사후조정 현장 취재진이 가장 주목한 인물은 단독 조정을 맡은 박 위원장이다. 박 위원장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돼 온 노사 교섭 상황을 이례적으로 언론에 수시로 브리핑하며 현장 분위기를 전달했다. “성실히 임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남기거나 별다른 답변 없이 회의장으로 향하던 노사 대표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교섭장 내부 상황을 밝히기 꺼려 온 기존 조정 관행과도 사뭇 달랐다. 국민적 관심이 쏠린 막판 교섭인 만큼, 그는 타결 가능성을 알리는 긍정적 신호를 취재진에 적극적으로 전했다. 박 위원장은 지난 18일 출근길에도 기자와 만나 “파업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며 배수진을 치듯 각오를 밝혔다. 조정위원이 사전에 이처럼 구체적인 목표를 대외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노동계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조정 방식도 독특했다. 통상 노동위원회의 막판 조정은 밤을 새우는 마라톤 회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결렬됐던 12일 삼성전자 노사의 1차 사후조정 때도 공식 휴정 없이 회의가 자정을 넘겼다. 반면 이번 2차 사후조정은 오전 10~12시, 오후 2~4시, 오후 5~7시 등으로 시간을 명확히 나눠 진행됐다. 한때 노사가 휴정 시간을 이용해 각자에게 유리한 여론전을 펼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양측 모두 머리를 식히고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냈다는 평가다. 삼성전자 노조 관계자는 “1차 조정 때는 밀실에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했는데, 2차 조정에서는 공식 휴식 시간이 보장돼 오히려 대화가 더 편하게 풀렸다”고 전했다.
사흘간 이어진 2차 사후조정에서 최대 고비는 첫날인 18일이었다. 김 장관이 노사를 번갈아 만나며 사후조정 참여를 이끌어냈고, 노사도 조정에 앞서 비공개 회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첫날부터 극적인 조정안이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노사는 막판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오후 7시 예정된 종료 시간보다 40분 일찍 회의를 마쳤다. 사후조정 둘째 날인 19일에도 타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 배경이다. 노사 대표단의 표정만으로는 교섭 분위기를 읽기 어려웠다. 삼성전자 사측 대표단은 첫날 교섭을 마친 뒤 아무런 말 없이 회의장을 떠났다. 최승호 삼성전자 노조 위원장도 “성실하게 교섭에 임하겠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회의장에서 누가 나온다’는 말 한마디에도 흩어져있던 취재진이 회의장 앞으로 달려갔다.
사후조정 회의장 밖 분위기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탔다. 타결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졌다고 취재진이 직감한 순간은 19일 오후 4시께였다. 최 위원장이 처음으로 삼성전자 노조 조끼를 벗고 셔츠 차림으로 회의장을 나선 것이다. 노동계에서 노조위원장이 교섭 도중 조끼를 벗는 장면은 결렬이든 타결이든 협상이 사실상 최종 결론에 이르렀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앞서 현장에는 박 위원장의 “합의 가능성이 있다”는 발언이 퍼진 뒤였다. 최 위원장의 조끼 탈의는 노사가 합의에 직전까지 다가섰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졌고, 팽팽했던 교섭장의 공기도 이때를 기점으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20일 오전 사후조정이 최종 무산된 후, 최 위원장이 “결국 파업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끝내 눈시울을 붉히자 현장의 합의 기대감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 교착 상태를 다시 급전환한 건 노동부의 교섭 재개 공지였다. 김 장관은 민주노총과 철도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노사 교섭의 지난한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동시에 민간 노사 문제에 정부의 강제 파업 금지 제도인 긴급조정권을 발동할 경우, 노사는 물론 노정 관계가 파탄에 이를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일관되게 노사 문제는 대화로 풀어야 하며 긴급조정권 발동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김 장관은 20일 오후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불광불급(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희망은 절망 속에 피는 꽃. 끝나야 끝난다’라고 적으며 회의장에 들어선 후 6시간 뒤 노사와 손을 마주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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