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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시대에 잡지를 구독하는 이유

정재민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레거시 미디어’만이 가진 감각 소중

독자와 다진 신뢰, 알고리즘 흉내 못내

정체성·따뜻한 시선이 잡지가 살 길

입력2026-05-23 05:00

수정2026-05-23 05:00

지면 23면
정재민

정재민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필자는 몇 년째 시사 잡지를 구독하고 있다. 판촉원의 호소에 마지못해 구독 갱신을 수락하면서 이것이 잡지에 대한 애정인지 의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올해도 결국 의리를 이어가기로 했다. 마침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대형 잡지사 관련 기사가 눈길을 끈다. 건강·피트니스 분야를 대표하던 ‘셀프’가 폐간되고 독일·스페인·멕시코판 ‘글래머’와 이탈리아판 ‘와이어드’도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다. 최고경영자(CEO)는 전체 매출의 1% 수준이라며 의연한 척하지만 결국 생존을 위해 덜어낸 살이라는 씁쓸함이 배어 있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전 세계 잡지 산업은 소멸의 궤도를 그려 왔다. 인쇄 광고 시장은 급격히 축소됐고 디지털 전환은 구원이 되지 못했다. 소셜 플랫폼이 독자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인공지능(AI)이 클릭 없이 요약된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제로 클릭’ 시대를 열고 있다. 여행 정보, 요리 레시피, 재테크 조언, 건강 상식까지 한때 잡지가 공들여 큐레이션하던 정보들이 이제는 AI와 몇 번의 대화만으로 정리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4년 잡지 산업 실태 조사에 따르면 국내 잡지 산업의 총매출액은 5315억 원으로 2021년 대비 21%나 줄었다. 잡지사 평균 직원 수는 3.7명에 불과하고 잡지사의 61%가 연 매출 1억 원이 안 되는 영세 사업체다. 2025년 언론 수용자 조사에서 지난 1주일 동안 잡지를 이용한 비율은 4.4%, 시사 잡지만 따지면 1.9%에 그쳤다. 잡지라는 매체가 사실상 대다수 사람의 일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잡지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격세지감이다. 어린 시절 보물섬·어깨동무·새소년은 매달 발행일마다 서점 앞에 줄을 서게 했고 사은품도 큰 즐거움이었다. 여성 월간지는 문화의 나침반이었고 월간 산과 낚시는 동호인들의 바이블이었다. 선데이서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대 풍경이었다. 타임과 뉴스위크는 세계를 이해하는 창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타임은 이제 인쇄판을 격주로 발행하고 뉴스위크는 한때 1달러에 매각된 뒤 인쇄판을 중단했다가 재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잡지는 흔히 ‘레거시 미디어’라고 불린다. 유산(遺産)이라는 뜻이다. 유산은 사라진 시대의 흔적이면서도 후대에 남겨 줄 가치이기도 하다. 잡지는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다. 한 주 혹은 한 달의 시간을 들여 고르고 배열한 기사들, 사진과 텍스트의 리듬, 그리고 독자와 천천히 축적해 온 관계의 감각이 있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흉내 낼 수 없는 신뢰와 정체성이다. 의리로 잡지를 구독한다고 했지만 매주 따끈따끈한 잡지를 받아 볼 때마다 구독하기 잘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다.

AI가 모든 정보를 즉각 제공하는 시대일수록 편집자의 안목과 독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은 더 소중해진다. 건조한 풍요 속에 만날 수 있는 안온한 희소성이다. 잡지가 살 길이 있다면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잡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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