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대만병’
입력2026-05-27 17:18
지면 35면
최형욱
논설위원
지난해 11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대만 중앙은행이 반도체 수출을 뒷받침하려고 통화 약세를 인위적으로 유도하면서 ‘대만병’을 야기하고 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대만 경제가 외형상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반도체 수출 중심의 왜곡된 성장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내수 부진, 소득 양극화 등의 부담을 떠안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지 언론들도 대만 경제가 ‘네덜란드병’에 걸렸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내보내고 있다. 네덜란드병은 네덜란드가 1959년 북해 가스전 발견 이후 천연가스 수출이 급증하면서 물가·임금 등이 상승하고 다른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등한시하다가 국가 경제가 뒷걸음질한 데서 유래한 경제학 용어다. 요즘은 국가나 기업이 특정 산업이나 제품에 과도하게 의존하다 장기 성장 역량이 후퇴할 때도 쓰인다.
올해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반도체 수출과 설비투자 증가에 힘입어 지난해에 이어 8%대 고성장이 예상된다.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4만 585달러로 전년보다 14.2%나 증가하면서 한국을 추월했다. 주가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하지만 ‘K자형 성장’ 우려도 크다. 성장세를 보이는 산업은 정보기술(IT)·의약품 등 일부에 불과하고 기계·장비, 금속, 의류 등 대다수 전통 산업들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의 평균 연봉은 4만 2000달러에 이르지만 전체 업종 평균은 2만 4000달러에 불과하다. 소득 격차가 심화되자 일부 청년들은 빚을 내 증시에 뛰어들고 있다.
올해 1분기 우리 경제가 1.7% 깜짝 성장했지만 반도체를 제외할 경우 절반 정도에 그친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은 지난해 4월 20.1%에서 올 4월 37.1%로 거의 2배로 뛰었다. 기존 주력 산업의 퇴조, 소득 양극화, 원화 약세 등도 대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반도체 호황으로 인해 한국은행이 금리 인상 시기를 앞당길 경우 취약 계층의 금리 부담이 커지게 된다. ‘대만병’은 여러모로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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