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전에도 K문화는 동아시아 중심” 유홍준 관장이 말하는 K의 뿌리
[서울포럼 2026 픽셀앤페인트]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이 전하는 K의 힘
전례 없는 공예, 조형 기술 갖춘 백제, 신라
고구려 벽화는 문화적 여유 드러내
문화 수입국에서 문화 공급국으로 진전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당당한 지분을 가진 문화적 주주국가였습니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8일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 ‘픽셀 앤 페인트(Pixel & Paint)’ 기조연설에서 “우리는 세계 문화사 속에서 단 한 번도 기술과 미감에서 낙오된 적이 없었다”며 오늘날 K컬쳐 열풍의 원천은 가장 오래된 한국의 혼에 있다고 밝혔다. 방탄소년단(BTS)과 K팝, K드라마를 넘어 한국 문화가 세계 미학의 기준으로 부상한 배경에는 수천 년 동안 축적된 한국 문화의 독창성과 개방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유 관장은 이날 ‘한국 역사의 힘과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주제로 선사시대부터 조선 백자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사의 흐름을 짚으며 “백제의 수준 높은 공예, 고려의 상감청자 기술 등을 볼 때 이전에도 K문화는 동아시아에서 상당한 문화적 지분을 차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한국사에 대한 기존의 ‘작고 약한 나라’라는 인식부터 뒤집었다. 미국 하버드대 동양학자 에드윈 라이샤워 등이 집필한 동양문화사 서문을 인용하며 “한국은 중국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럽의 보통 국가와 비슷한 규모”라며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를 합친 면적과 비슷하다”고 소개했다.
무덤 속 작품에서도 보여지는 대가의 여유
유 관장은 한국 문화의 시작점으로 연천 전곡리 유적을 꼽았다. 1979년 발견된 주먹도끼는 유럽과 인도까지만 존재한다는 기존 ‘모비우스 라인’ 가설을 뒤집으며 세계 고고학 지도를 바꿔놓았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 역시 신석기 시대 한반도인의 세계관과 샤머니즘, 고래사냥 문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유산으로 평가했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며 고구려 벽화는 단순한 장례 그림을 넘어 동시대 동아시아 회화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무용총 수렵도에 대해 유 관장은 “유머는 대가만의 특권”이라며 “마치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사냥 의사가 없어 보이는 청년까지 그려 넣을 정도로 당시 고구려 장수왕 때 문화가 여유로웠다”고 설명했다.
백제 문화의 핵심은 공예였다. 유 관장은 부여 금동대향로를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조형미로 꼽았다. 산악 풍경과 악사, 봉황이 어우러진 향로에는 백제 장인 정신이 응축돼 있다는 것이다. 무령왕릉 왕비 팔찌에 공예가 이름이 새겨져 있는 사례를 언급하며 “백제는 장인이 존중받던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는 백제 미학을 상징하는 말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를 제시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유 관장은 이를 “조선의 미(美)이자 한국의 미이며 단순한 미학을 넘어 삶의 태도에 관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일본, 인도와 다른 K의 정신
신라는 국제성과 불교 문화의 정점을 보여준 사례로 소개됐다. 유 관장은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병과 시리아 계통 장신구를 언급하며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신라의 교역 범위는 훨씬 넓었다”고 말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전시된 금동반가사유상은 한국 조각사의 상징으로 꼽혔다. 유 관장은 “중국·일본·인도의 불상과는 다른 은은한 미소를 갖고 있다”며 “기원전 600년 무렵 한국 조각 수준이 어디까지 올라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석굴암·불국사·성덕대왕신종이 한국 문화의 절정을 이뤘다. 성덕대왕신종에 대해서는 종 제작에 참여한 기술자 이름까지 새겨 넣을 정도로 당시 사회가 장인을 존중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방탄소년단(BTS)이 최근 신곡에 성덕대왕신종 소리를 활용한 사례를 언급하며 “K컬처는 결국 이런 전통 위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고려에 이르러 한국 문화는 세계적 수준의 도자기와 회화를 꽃피웠다. 유 관장은 고려청자를 두고 “인간이 만든 그릇 가운데 청자 세라믹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단언했다. 특히 상감청자는 “중국에도 없었던 고려만의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청자운학문매병에 대해선 “형태와 문양, 질서와 변화의 균형이 완벽하다”고 평가했다.
유 관장은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선의 미학’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달항아리에 대해선 “기하학적 완벽함보다 인간적인 곡선의 따뜻함이 살아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을 인용해 “중국 도자기는 멀리 두고 감상하고 싶고 일본 도자기는 곁에 두고 쓰고 싶지만 조선 백자는 어루만지고 싶어진다”고 소개했다.
유 관장은 “오늘날 K컬처는 역사적 축적 위에서 탄생한 만큼 이제 문화 수입국이었던 한국이 이제는 문화 공급국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이날 행사 개회사와 축사에서는 K컬처의 성장 가능성과 전통 문화의 중요성이 잇따라 강조됐다. 손동영 서울경제신문 대표는 “‘K의 힘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가, 그 동력은 무엇인가’가 올해 픽셀 앤 페인트가 던지는 질문”이라며 “가장 미래적인 K의 표정 안에는언제나 가장 오래된 한국의 혼이 살아 있다. 전통은 과거 유산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참석한 김영수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은 축사에서 “K팝과 K드라마, K푸드, K뷰티를 넘어 한국 문화는 이제 전 세계인의 일상에 녹아든 생활 문화가 됐다”며 “K컬처는 대한민국의 미래 핵심 성장 산업”이라고 말했다. 이범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도 “한국 문화예술이 이제 세계를 선도하는 기준이 되는 역할을 해야 할 시점”이라며 “K컬처 시대에 맞는 문화 강국 전략과 문화 이니셔티브를 선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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