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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 재계처럼…기업이 ‘AI 사회적 계약’ 제안해야

이보형 마콜 컨설팅 그룹 사장

입력2026-05-29 10:26

이보형

이보형

마콜컨설팅그룹 사장

기업 주도의 사회적 계약을 제안하는 모습을 묘사한 AI 이미지.
기업 주도의 사회적 계약을 제안하는 모습을 묘사한 AI 이미지.

온 세상이 인공지능(AI)을 말한다. 정부는 국가경쟁력을 말한다. 기업은 생산성을 말한다. 학교는 AI 교육을 말한다. 정치권도 뒤늦게 규제와 진흥을 함께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직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AI가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더 피곤하게 만들 것인가.”

지난 25일 교황 레오 14세는 AI 시대의 인간 존엄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산업혁명기에 노동 문제가 문명의 의제가 되었듯, AI 시대에는 인간의 시간, 판단, 노동, 존엄이 새로운 사회 의제가 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사회의 운영체제를 바꾸는 힘이다. 그 힘이 인간을 돕는 도구가 될지, 인간을 더 빠른 시스템에 종속시키는 장치가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을 명령에 복종하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성과를 내야 한다고 믿는 성과주체로 보았다. 그가 이런 사회를 ‘성과사회’라 부른 이유는 자유의 외피가 자기착취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AI는 이 성과사회의 가장 강력한 증폭 장치가 될 수 있다. 예전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이 최소한의 방어선이었다. 이제는 그 방어선마저 무너질 수 있다. ‘AI가 있는데 왜 아직 안 됐느냐.’ 이 말이 일터의 새로운 규율이 될 수 있다.

AI가 업무를 줄여준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현실의 조직에서는 AI가 만든 초안만큼 더 많은 수정 요구가 생긴다. 더 빠른 보고가 요구된다. 더 촘촘한 성과 측정도 가능해진다. 한 사람이 처리해야 할 일의 양은 줄지 않는다. 기대 수준만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AI는 인간을 쉬게 하는 기술이 아니다. 피로사회를 자동화하는 기술이 된다.

그래서 AI 논의는 산업정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반도체, 데이터센터, 인재 양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AI는 채용과 평가를 바꾼다. 교육과 의료를 바꾼다. 금융과 복지를 바꾼다. 행정과 여론 형성도 바꾼다. AI 정책은 산업정책인 동시에 노동정책이고, 교육정책이며, 복지정책이다. 나아가 사회체계 전반에 대한 정책이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최근 ‘모두를 위한 AI’와 ‘인간 중심의 포용적 AI’를 말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AI를 성장동력으로만 보지 말자는 뜻이다. 인간의 삶 전체를 바꾸는 사회적 전환으로 보자는 뜻이다. AI의 책임 있는 이용,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규범과 표준, 인간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통제 장치가 함께 논의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이제 필요한 것은 사회적 대화다. 다만 그 대화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같은 기존 구조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AI로 인한 변화가 단지 노동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소비자 보호, 개인정보, 저작권, 공정경쟁, 의료 판단, 금융 심사, 콘텐츠 신뢰, 국가안보와 연결된다. 논의의 주체도 더 넓어져야 한다. 늘 참여하는 단체들에 머물지 말고 실제로 영향을 받을 곳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참여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출발점이다. AI를 실제로 도입하고, 직원에게 적용하고, 소비자와 만나는 곳은 기업이다. 사회가 체감하는 AI도 결국 기업의 채용 시스템, 고객센터, 금융 심사, 업무 평가, 콘텐츠 추천, 의료·복지 서비스에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AI 사회계약의 논의도 기업 현장에서 먼저 시작돼야 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그런 움직임이 시작됐다.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IBM, SAP 등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참여하는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얼라이언스(BSA)는 2024년 ‘책임 있는 AI 구축을 위한 정책 해법’을 내놓았다. 각국 정책결정자를 향해 위험기반 접근, 기업 거버넌스, 고위험 AI 영향평가, 고위험 AI 테스트, 창작자 권리 보호 등을 제안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정부 보고서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산업계의 제안이라는 사실이다. 기업들이 규제를 피하려 한 것이 아니다.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AI 규칙의 방향을 먼저 제안한 것이다.

일본 경단련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경단련은 이미 2019년 ‘AI 활용 전략, AI 준비된 사회의 실현을 향하여’를 제안했다. 2023년에는 ‘AI를 통한 Society 5.0 for SDGs의 실현’과 ‘AI 활용 전략 II’로 논의를 확장했다. 핵심은 명확하다. AI 기업만 준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업, 개인, 사회제도가 함께 준비돼야 한다는 것이다. 경단련은 AI를 일본의 Society 5.0, 즉 인간 중심의 초스마트 사회와 연결했다. 기술 도입을 넘어 사회 설계의 문제로 본 것이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기업단체가 먼저 사회적 대화의 의제를 만들 수 있다. 정부가 정답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산업계가 먼저 원칙을 제안하고, 전문가가 검증하고,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토론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면서 이를 제도화해야 한다. AI처럼 변화가 빠른 영역에서는 오히려 이런 방식이 더 현실적이다. 규제는 늘 기술보다 늦다. 그렇다면 사회적 논의는 기술을 쓰는 현장에서 먼저 시작돼야 한다.

AI 경쟁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경쟁의 기준이 속도만이어서는 안 된다. 더 빨리 도입하는 나라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인간의 시간을 삼키지 못하게 하는 나라, 사회적 설계 능력을 가진 나라가 살아남는다. 기업 전략도 마찬가지다. 기술을 얼마나 빨리 쓰느냐도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AI 운영질서를 누가 먼저 제안하느냐는 더 중요하다. 그래야 기업도 지속가능하다.

AI는 인간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AI는 인간을 소진시킬 수도 있다. 피로사회가 AI를 만나면 피로는 더 정교해진다. 더 조용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AI를 막는 정치가 아니다. AI를 인간의 질서 안에 두는 사회적 대화다. 그 출발점은 정부의 위원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제로 쓰고, 그 영향을 가장 먼저 확인하는 기업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은 기업이 먼저 AI 시대의 사회계약을 제안할 때다.

이보형의 퍼블릭 어페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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